전봉건의 전쟁 체험과 에로스적 상상력
상태바
전봉건의 전쟁 체험과 에로스적 상상력
  • 정민나
  • 승인 2018.06.22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시단] 정민나 / 시인





전봉건의 시세계는 6·25의 정신적 상흔들을 아름답게 노래한다. 탁월한 언어감각을 통해 전장의 트라우마를 신경증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미적 승화를 거쳐 그 불쾌한 경험을 생산적인 것으로 드러낸다.
1950년에 등단하여 1988년 작고하기까지 40여년의 시작 활동 기간 줄곧 한국전쟁의 시적 형상화에 힘쓴 전봉건은 1950년대 한국시의 흐름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과 분단 의식에 바탕을 둔 전봉건의 시세계는 50년대 체험을 형상화 하는데 주력했는데 전쟁과 실향의 모티프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제국주의의 침탈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JET」, 「DDT」, 「BISCUITS」, 「ONE WAY」, 「0157584」와 같은 전쟁 체험의 형상화를 통해 보여주는 전봉건의 6·25 연작은 역사의 증언을 수행하는 것과 같다. 시적 자아의 정신적 상처를 반증하면서 전쟁의 폭력성과 비정함을 비판하는 행위여서 그의 전쟁시는 근원적 생명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해방 직후 한국 시단은 좌우 이념 대립으로 “일시적 불안의 시대” 혹은 “과도기적 상황”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새로운 시인이 등장할 만한 제반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전봉건은 1950년대 후반기의 방계 동인으로 등장하여 나름의 모더니즘을 전개한 시인이다.
1950년 「6·25」에 참전해 부상으로 제대한 전봉건은 이 때의 전력으로 전쟁터의 처절한 상황을 시로 쓰게 된다. 전봉건의 시적 묘사에 있어서 이미지 처리 방식은 대상을 시각적으로 묘사하여 독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현실을 덮어 버리고 그 빈자리에 대체 현실 즉 환상을 전경화 한다. 환상적 이미지의 표출 과정을 통해 전쟁터에서 숨 막히는 억압과 공포를 전복하는 것이다. 긴박하고 공포스런 전쟁의 와중에 말의 엉덩이나 탱탱한 팬티를 떠올리는데 그의 전쟁 시편 곳곳에서 드러나는 감각적 이미지들은 대상의 성격을 형상화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잊게 하는 환상성의 기능을 보유하는 것이다.
또 전쟁의 비정성을 드러내는 사물의 수치화나 계량화, 존재의 익명화는 인간의 자율성이 사라진 전쟁의 풍경을 ‘장면화’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인간 존재의 몰가치한 일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시속 120마일로 종군목사의 JEEP이 옆구리를 스친다.
내 수통은 비었다.
하얀 나뭇가지 아래서 디룩거리는
만주산 말의 엉덩이. 나는
탱탱한 팬티를 생각하며 미끄러지는 군화에 중량을 보탠다.
산허리에 반사하는 일광.
BAR의 연사.
비둘기의 똥냄새 중동부전선.
나는 유효사거리권내에 있다.
나는 0157584다.

— 「0157584」부분

 

위 시에서는 「0147584」라는 일종의 기호를 사용하여 시인의 존재를 수치화시킴으로서 인간을 사물화 된 비 — 존재의 모습을 취하게 한다. 대상으로서의 현실 역시 꿈꾸듯이 비실재화 시킴으로서 초토화 되는 현실의 무의미성을 부각시킨다.
쏟아지는 포탄과 반사하는 일광 속에서 그의 시는 에로스적 상상력이 분출한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생의 타나토스적 본능으로 반동 형성하는 것과 같다. 프로이드는 상징계의 억압이 일어난 후에 성적 희열이 오는 것을 ‘잉여 — 주이상스’라고 하였는데 무의식이 의식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왜곡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미 임종이 가까운 그의 두 눈은 그저 크게 뜨여 힘없이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또 자취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이었던가. 텅 비어 있음에 다름 아니던 그의 두 눈에 빛이 고이고 바람도 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이 깃들고 그 푸름도 깃들었다. 성좌가 아롱지는가 했더니 강물이 흘렀고 나뭇잎을 흔드는 숲이 들이차기도 했다. 훤하게 트인 길을 거느린 해안과 산맥이 구비치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그의 두 눈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의 두 눈은 잔잔한 미소마저 띠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두 눈에 듬쁙 이술 머금은 꽃덤불로 둘러싸인 샘물이 떠올라 넘칠 듯 넘칠 듯한 바로 그 때였다. 그는 검붉은 피 엉겨찌든 손가락을 들어 어슴푸레한 방 한 구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가르키는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거기엔 무엇이 있었던가.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항이리였다. 항아리 하나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기 위하여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다시 떠 보았다. 그런데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다시 눈 떠 본 것은 항아리가 아니라 한 여자였다. 가느다란 모가지 고운 젖무덤 늘씬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 한 젊은 여자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풀어내는 스스로의 살빛으로 피냄새 절은 어슴푸레한 어둠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 전봉건 「암흑을 지탱하는」 부분


 
죽어가는 동료를 들쳐 메고 뛰어든 어느 건물 안에서 이 시의 화자는 항아리를 발견하고 거기서 살빛을 풀어내는 여인을 보게 된다. 피 냄새가 짙은 전쟁터에서 희고 맑은 젖빛 항아리를 발견함으로서 비록 환상이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린다. 이것은 죽음의 공간에서 화자 스스로 자기 존립의 의의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봉건의 전쟁시에서 화자 충족의 시도는 항시 좌절을 일으키는데 이 때 시각적인 육체의 이미지, 즉 상상계에 속하는 심리 내적인 형성물은 자아에 대한 리비도의 투여를 끌어낸다. 프로이트는 성적인 충동이 자기 보존충동에 의지하는 것을 ‘의탁에 의한 대상 선택’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리비도는 아메바처럼 또는 깨어진 계란처럼 흘러 다니다가 우리 몸의 구멍에 달라붙어 충동을 형성한다. 위의 시에서 화자의 일련의 연상, 즉 환유적인 미끄러짐은 프로이트가 ‘환자로 하여금 끝까지 말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치유의 전부’라고 말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함박꽃 거리에서 / 사마귀가 성교 도중 암컷에게 먹히기 시작한다 / 머리부터 / 머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 쾌감 / 하늘과 땅 사이에 기댈 마른 풀 한 가닥 없이 / 몸뚱어리 / 몽땅 꺼내놓고 / 우주 공간 전부와 한 번 몸 비비는 / 저 경련!

황동규 시인은 그의 연작 시집 『풍장』에서 사마귀가 성교 도중 잡아먹히면서 머리가 세상에 사라지는 쾌감(풍장 30)을 묘사했는데 이것은 전봉건의 시에서 전쟁의 한가운데 ‘비스켓을 먹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 그것은 죽음과 맞닥뜨려서 무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주체분열과도 같은 것이다. 전시의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 속에서 사소한 비스킷에 집착하는 퇴행의 행동은, 다시 말해 주체가 위험하면 인간의 나약한 의식은 불온하게 비정상성이 되고 현실원칙을 파괴하는 충동인 주이상스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원리와 동일한 현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 틈입이 한 치도 허용되지 않는 전봉건의「BISCUITS」시의 상황과 황동규 「풍장 30」의 상황은 압도된 인간 존재의 상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의 詩史的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 손상을 입거나 수탈당하면 필사적으로 그것을 수호하려는 문학 운동이 전개되기 마련이다. 인간의 역사는 외부 세력의 침략에 대하여 응전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 인간과 역사의 필연성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시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전봉건이다.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시를 썼음에도 전봉건은 이념이나 명분에 휘둘리지 않는 20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를 썼다. 또 전통적인 구성을 통한 이야기 줄거리를 말하지 않고 경험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의 창조적 결합으로 삶의 실상에 내재한 가치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야기의 흐름이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 흘러간다. 밖의 실재성에 더하여 이른바 내적 진실의 추구라는 자아와 세계의 합의를 갖게 되는데 전봉건 시 속에서도 심리주의 서사의 한 흐름을 보게 된다. 이 때 서사적 자아는 세계와의 균형을 적극적으로 이루며 끊임없이 자아의 확립을 기하는 것이다
그의 ‘참전시’는 외세에 대한 항전 의식을 창조적인 자기 서사에 기반하여 열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저변에는 현실에 의해 해체되는 자아의 형상화가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적 공간은 생명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 된다. 안과 밖의 모든 외세에 대해 자기를 지키려는 시인은‘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기 정체성에 도전하며 세계와의 교섭에 천착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