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은 사랑의 날개를 달고
상태바
가방은 사랑의 날개를 달고
  • 조영옥
  • 승인 2018.07.13 12: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자칼럼] 조영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회원


지난 겨울 우리 가족은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왔다. 미개척지인 오지마을 ‘깜뽕쁠럭’-일명 동양의 아마존이라고 하는 곳이다. 쪽배를 탄다고 해서 우리는 잔뜩 기대를 하였다. 가이드는 깜뽕쁠럭 호수에 가려면 새벽 7시에 출발하여야 하는데 너무 이르니 그와 환경이 비슷한 톤레삽 호수를 가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이곳은 아홉시에 출발해도 일정에 차질이 없으니 일행들끼리 의견을 조율해달라고 부탁한다.

일행이래야 우리 가족 다섯 식구, 칠순여행으로 오신 부부, 그리고 부부교사가 전부이다. 나와 딸아이는 ‘일곱 시 쯤이야’ 하면서 새벽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늦잠 자는 사위와 손녀에게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부부 한 팀도 곤란한 표정을 짓기에 가까운 곳을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가이드는 그러면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그 전에 현지인이 사는 곳을 안내하고 싶다고 한다. 여행에서 풍경과 유적도 좋지만 현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기사는 흙길을 한참 달려가 한적한 마을에서 차를 멈추었다. 가이드가 커다란 가방 속에서 쌀을 담은 작은 봉지를 꺼냈다. 이 십여 개 속에서 서너 개씩 나누어 우리에게 주면서 들고 내리라고 한다. 우리는 의아해 하면서 그것을 받아 가지고 걸어가는데 우르르 아이들이 쫓아 나온다. 검은 얼굴에 눈만 반짝이는 아이들의 시선은 온통 쌀 봉지에 모아진다. 가이드와는 구면인 듯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잡아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자기 집에 쌀 봉지를 주고 가라고 붙잡는 것이란다. 그들이 하도 딱하게 살아서 가끔 들를 때마다 가이드는 쌀을 가지고 와 한 봉지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현지인 마을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 비참했다. 주변엔 발 디딜 틈도 없이 쓰레기가 널려 있고 파리는 윙윙 거리는데 집이라고 가리키는 곳은 시골 원두막같이 생겼다. 앞을 가리려고 쳐놓은 천 조각이 땟국에 절어 펄럭인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런 가구도 취사도구도 없이 냄비 한 두 개가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갈라진 마루 위에 시커먼 얼굴을 한 노인과 남자가 어린애와 누워있다. 조금 큰 애들은 흙바닥에서 뒹굴며 놀고 있다가 우리 손에 들려진 작은 쌀 봉지에 시선이 닿자 곧 우리들을 쫓아 나온다.

“이렇게도 살 수 있네요?”
가이드를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돈을 벌려고 마을을 벗어나려 해도 아무런 교통수단이 없어요, 마을엔 일 할 곳도 없고, 물도 없어서 더운 날씨에 퍼렇게 녹조가 낀 호수에서 목욕하고 대소변 보고 그 물로 밥 해 먹고 빨래하고 살지요”
캄보디아에 10년째 산다는 가이드가 딱한 표정으로 이야기 한다.
 
나는 문득 전후(戰後),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떠올랐다.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우물물 길어 밥 해먹고 빨래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목욕을 자주 못해 손발에 때가 끼고 머리와 옷에 이가 기어 다니기는 했지만 살아 보려는 의지는 강했다. 그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짐승 우리와도 같은 환경에서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비참함에 놀라 가슴이 아프다가 이내 나태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무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해도 말라빠진 풀뿌리라도 뽑아 비를 매어 청소라도 못한단 말인가? 전기가 들어오나? 우물이 있나? 학교가 있나? 공항에서 얼마 떨어진 지역도 아닌데 이 사람들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경찰만 되어도 뇌물과 부정부패로 땅 사고 집 사고 차까지 굴리면서 잘 산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나는 이들이 버림받은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건강한 남자가 있는 집은 새벽에 십리나 되는 길을 걸어가 호수에 있는 고깃배에서 해질 때까지 하루 열 시간 일해서 받아오는 2달러, 이것이 그들의 생계수단이라고 한다. 그러니 관광객을 만나면 1달러! 1달러! 하고 쫓아다니는 아이들의 구걸행위가 큰 수입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연고로 부모들도 은근히 아이들에게 구걸을 시키는 듯했다.

“날씨가 좋아서 3모작도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살지요?”
답답한 마음에 나는 또 가이드에게 물었다.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기구가 없고 기술도 없고 주변 땅에는 지뢰가 묻혀 있어 건드리면 손발이 다 날아가는 일이 흔해서요…….”
실제로 거리에는 불구자도 많았다. 그들은 체념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사는 것이었다. 그 옛날에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일으킨 국가가 어찌하여 졸지에 세계에서 최하위 빈국이 되었을까. 나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앙코르 왓트 사원이라든지 킬링 필드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 갑자기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이 생겨 책이라도 보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일정대로 우리는 톤레삽 호수를 보러 갔다. 호수에 세워진 수상가옥 사이를 쪽배를 타고 다니면서 구경했다. 조금 전에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왔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살펴보게 되었다. 호수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 배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수상가옥이지만 제법 규모가 있고 배위에서 꽃도 기르고 닭도 돼지도 기르는 것이 흥미로워 보였다. 배를 타고 가면서 안을 들여다보니 가구도 조금씩 갖추어 놓고 TV도 있고 어느 집은 식수로 사다놓은 생수병이 쌓여 있는 것도 보였다. 집집마다 양은 냄비를 반짝 반짝 닦아서 벽에 걸어 놓은 것이 신기했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냄비 닦아 놓은 것을 보고 아내가 살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따져서 그 집의 딸을 색시 감으로 선택한다고 한다.
 
점심 후에는 재래시장을 돌아보았다. 과일과 야채는 우리나라 농산물과 종류와 모양도 비슷하게 생겼고 한국산 감이 수입되어 비닐봉지에 담긴 채로 진열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릇에 담아 놓은 물고기가 아가미를 벌름 거리고 있다. 오늘 아침 톤레삽 호수에서 잡아 온 것이라 한다. 돼지고기, 소고기, 오리, 닭고기가 좌판에 널브러져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시설이 없어 하루에 팔 수 있는 양 만큼만 늘어놓고 판다고 한다. 고기 위로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부채로 쫓는 시늉을 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6.25 전후(戰後)에 우리네 장터 모습도 이랬을까?’하고 상상을 해보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남편이 가이드에게 물었다.
“아까 그 원주민들에게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요? 일할 만한 사람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가이드는 그들에게는 일하러 갈 수 있는 교통수단, 즉 자전거가 제일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일행 세 팀은 서로 의논 끝에 주머니에 가지고 나온 돈을 즉석에서 털어 보았다. 백 달러가 조금 넘었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우리가 모은 돈을 건넸다.
가이드는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나와 어찌 어찌하여 여기 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비수기에는 남쪽에 가서 농사짓는 법도 가르치고 아이들도 가르치며 NGO 활동까지 한다. 그는 어떻게 자기를 믿고 돈을 주냐고 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일호의 의심도 없이 우리는 돈을 건넸다.
돈을 받은 가이드는 “남의 아이들도 잘 건사해주고 청소도 잘하는 부지런한 젊은 엄마에게 자전거를 사주면 시내에 나가 가정부 일을 해서 자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 아이들이 제일 갖고 싶은 것이 가방이라고 말한다. 부직포로 만들어진 가방이라도 여기서는 아주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라고 한다.
 
‘가방이라?’
그 말을 들은 딸아이가 골똘히 생각을 한다.
“가방을 어디서 구하지?”
‘이런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아이들 입을 티셔츠와 바지, 그 외의 것들을 모아서 한 짐 가지고 올 걸’ 하고 아쉬워한다.
“엄마,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윤교가 한 달만 있으면 유치원 졸업 하는데 원장님께 부탁해서 졸업하는 아이들 가방을 수거해 달라고요”
“오, 그러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빨리 모아서 아이들 어깨에 메어 주고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딸아이는 바로 유치원을 찾아가 원장님께 도움을 청했다. 원장님은 쾌히 승낙 하시면서 졸업식에 모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졸업식 날, 가방을 메고 오라는 원장님 말씀에 부모들은 왜 가방을 메고 오느냐고 의아해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방을 메어 보냈다. 150명 중에 75명이 가방을 가지고 와서 받아 놓았으니 며칠 후에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외출에서 돌아오니 딸아이가 욕조에 가방을 하나 가득 담아 세제를 잔뜩 풀어 놓고서 발로 밟고 야단이다. 그래도 때가 안 빠지는 것은 일일이 솔로 문질러서 깨끗이 빨았다.
“엄마 새것처럼 해서 주고 싶어요, 너무 더러워서 그냥 보낼 수가 없어요”
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딸아이가 이번엔 몸소 팔을 걷어붙였다. 손이 아프도록 솔질해서 빨고, 물기를 뺀 뒤에 빨리 마르라고 지퍼를 열고 주둥이를 벌려 가방 75개를 거실에 죽 늘어놓았다. 남청색과 빨강색이 섞여 있는 가방은 펭귄이 줄을 맞춰 앉아 있는 것처럼 귀여워 보였다. 며칠을 말려서 박스에 담으니 꾹꾹 눌렀는데도 부피가 엄청나다. 보내는 김에 연필과 공책도 백 권씩 사서 담았다. 그 뜻에 공감해서 임실에 계신 사장님이 벌레 물린데 바르는 크림을 백 개나 보내주셔서 짐이 더욱 늘어났다. 우체국에 가서 알아보니 요금이 보통이 아니다. 배로 부치면 요금은 싸나 컨테이너에 짐이 다 모여야 출발을 하니 석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비행기는 사흘 만에 도착하나 요금은 몇 십만 원이나 했다. 알뜰한 딸아이가 요금 때문에 고민을 하더니 새 학기에 맞추어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 싶으니 비행기로 부치겠다고 한다.
“그래, 잘 했다. 너의 사랑을 가방에 실어 보내라”
며칠 후 아이들이 가방을 어께에 메고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가이드가 카톡으로 보내 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