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배다리, 고추 말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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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배다리, 고추 말리기
  • 강영희
  • 승인 2018.08.0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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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붉은 융단이 깔리는 여름날의 기억

 


해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도원역에서 내려 도원교를 건너면서 ‘더위가 한 풀 꺽였네!’라는 생각을 하며 철로변길에 들어서곤 했다. 덥지만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그림처럼 떠 있는 풍경을 느낄라치면 매운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그제야 하늘에 꽂혔던 시선은 땅으로 내려온다. 여름의 붉은 융단이라 부르는 붉은 고추가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곳곳에 깔려있었다.
 
이 계절 즈음 위성사진을 보면 동구와 그 인근지역이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물들어있는 모습이 눈에 들온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아마도 볕이 닿는 거의 모든 곳에서 붉은 고추를 말리기 때문이리라.
 
그랬다. 붉은 고추의 매콤함 향이 코끝을 감돌면 쿨럭쿨럭 재채기를 하며 공방까지 걸어가곤 했고, 그 더운 중에 마을을 돌며 고추 말리는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고추를 말릴 때면 차들도 왠지 마을 안길을 덜 다니는 듯 했다.



 

고추말리기는 주로 어르신들이 하셨다. 먹이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처럼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아 움직이시는 습관 탓이기도 할테고 전통적으로 그렇게 했으니 그러했을 수도 있다.
 
크고 건강한(?) 고추를 사서 볕 좋은 마당 같은 공간에 널고 보름간 두면 발갛던 고추는 검붉고 투명하게 마른다. 다 마른 고추를 마른 행주로 닦아 내고 자루에 담아 방앗간으로 가면 겨울 김장용 고춧가루는 물론 한 해 쓸 고춧가루가 마련된다.
 
이렇게 말하면 쉽지만 사실 도시 한가운데서 고추를 말린다는 게 전쟁 같은 일이란 걸 배다리를 오가며 알았다.



 

건강하고 좋은 고추를 골랐는데도 해마다 작황에 따라 좋아 보이는 고추도 무르고 곯기도 한다. 4-5일 말리고 나서야 그 건강함을 판단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말. 거기에 날씨도 한 몫 한다.
 
소나기가 한두 번 내리는 건 여름 볕에서 순식간에 마르기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고수와 초보의 차이가 난다. 고추가 말라있는 상황에 따라 대책을 마련하시는데 며칠 되지 않았으면 물기를 닦아내는 정도면 되고, 마른다는 느낌이 들 즈음이면 어느 정도 물기를 떨어내고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 재빨리 볕에 두고 말리는 게 좋다고 하신다. 그 판단은 매번 물어봐도 방법이 많이 다르다.
 
같은 시기인데도 비가 많이 내리고, 흐릴 때가 많으면 방법이 없다. 고추를 잘라서 말린다. 통으로 말리는 게 제일 좋지만 물러져도 날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재빨리 길게 또는 어슷썰기로 썰어 말리면 말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 날이 더우니 집안에서도 잘 마른다고도 하고, 그래도 물러질까 싶으면 그 더운 여름 보일러를 틀어 말리시기도 한다.

비가 종종 내리고 볕도 좋은 날이 반복되면 집안에 들여놨다 볕에 널어놓는 과정이 반복된다. 걷는 거야 별 문제없지만 다시 널어놓는 것이 큰일이라 비닐을 덮었다 빼는 것도 방법이었고, 그것도 비가 많이오면 바닥에 널린 것은 물에 잠길 우려가 커서 아예 바닥은 떨어지고, 비닐은 덮었다 접었다 할 수 있는 고추말리기용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드느라 다들 애쓰는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네 집에서 거의 다 말린 고추를 도둑맞았다는 말이 들리고 난 후 어르신들은 밤잠을 고추 옆에서 지새우시기도 했다. 어떤 분은 작은 텐트를 마련해 주무시기도 했는데 어차피 더운 여름 에어컨 없는 집에서 잠들기 힘든 거 텐트에서 잔다고도 하셨다. 저녁 늦은 귀갓길에 할머니들이 땅바닥에 자리를 펴 놓고 이야기 나누시거나 졸고 계시는 걸 철로변 길에서는 많이 봤다.
 
출근길에는 땀 흘리며 고추를 펴고, 어디 그늘진데 없나 골고루 살피시고, 그 한 낮에도 언제 내릴지 모르는 소나기를 걱정하며 나무 아래서 바쁜 부채질을 하며 앉아계시던 어르신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배다리 철로변길에서 그 노고를 보고 있노라면 ‘노인네, 병나시겠네!’ 하는 마음이 든다. 얼추 말라갈 즈음 여지없이 태풍이 오고, 고추 매운 향은 집안에 가득해진다. 이때부터는 또 볕이 날 때마다 내어놓으신다.

 
  


이 여름 한가운데의 농사에 성과는 얼마나 좋은 빛깔의 고춧가루가 됐으며, 몇 킬로를 말려 몇 킬로의 고춧가루를 빻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난다. 그 성과는 곧 출퇴근길의 내 귀에 들려오곤 했다. 몇 킬로 말렸는데 빻은 고춧가루가 몇 킬로다 하는 말씀을 하시면, 나야 그게 잘 된 건지 못된 건지 모르지만, 성공률이 높아 자랑삼아 하시는 말이란 걸 가늠하게는 되었다.
 
고추말리기를 얼추 끝낸 역전의 용사들의 무용담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고추말리는 과정을 듣다보면 다양한 상황에 다양한 대처법을 가진 건 역시 오랜 시간 많이 해 보신 분들이다. 그걸 듣다보면 젊은(?) 할머님들이 은근슬쩍 그 다음에 고추말리기에 동참하고 계신걸 보게 된다.

 




몇 해 전부터 어르신들이 더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해지시면서 골목길이며 철로변길에 고추를 말리는 일이 점점 줄더니 올 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날씨는 아직도 숨이 턱턱 막히도록 덥고, 작업실에 일하면서 이렇게 더운 날씨는 처음이라 밤늦게까지 일하는 일이 많이 줄었다. 너무 더운 날이 이어지고 있어 어르신들이 안보이니 고추 말리느라 고생하시지 않으시니 다행이다 싶기는 해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공방과 갤러리 앞에 볕이 좋다며 가득 고추를 말리던 모습이 그리워, 올해는 괜히 내가 고추를 말려볼까 하다가도 괜히 시작했는데 태풍이 오는 거 아닐까 싶어 머뭇머뭇. 한 계절을 가득 채웠던 것들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무엇이 그 계절을 채울지 가슴 한 켠에 뭔지모를 선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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