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임씨의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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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씨의 놀이터
  • 유병옥
  • 승인 2018.08.24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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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유병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 회원



  우리 아파트 후문 앞 인도에서 야채를 팔고 있는 순임씨는 올해 나이 94세 이시다. 그는 이곳에서 18년째 장사를 하고 계신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에 허리는 완전히 90도로 꺾이어 있고 남아있는 이는 한 개도 없다. 이가 없는 관계로 그가 먹는 것은 거의 우유뿐이다. 가끔씩 우유에 빵을 녹여서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하신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권장 내용과는 거리가 먼 식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그는 허리가 굽은것 말고는 건강한 편이다.

  순임씨의 가게는 아파트 담을 뒤로 의지해서 3면을 비닐막으로 둘러치고 위에는 비취파라솔을 펼쳐서 햇볕이나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의 가게가 한참 번창할 때는 채소를 늘어놓은 길이가 약 10m정도 되었고 종류도 다양해서 시장까지 가지 않아도 웬만한 것은 다 살 수 있었다. 그 때에는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들도 나와 어머니 일을 거들었다. 상품 정리, 배달, 청소를 했고 저녁이 되면 팔던 채소들을 잘 간수하고 비닐막을 정리 하는 등 힘든 일을 맡아 했다.
 

   인천에서 아시안 게임을 준비할 때 남동구청에서는 거리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그곳 노점상들을 모두 없애고 그 자리에 커다란 화분들을 놓고 국화를 심어 아파트 후문 일대를 깔끔히 정리 하였다. 노점상을 하던 생선아줌마, 바지락을 까서 팔던 할머니, 순임씨네 가게와 규모나 종류가 비슷했던 채소가게 부부들은 어디론가 옮겨가고 순임씨만이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길 건너 나무가 10여 그루 서 있는 작은 공터에 엉덩이를 들이밀고는 두 평 남짓한 자리를 마련해서 거기에 다시 비닐 막을 쳤다. 그 무렵 아들은 무슨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다고 하는데 순임씨 혼자서 다시 장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규모도 전보다 반으로 줄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 독감까지 걸려 힘들게 보낸 나는 날이 좀 풀려 나물거리라도 살 겸 순임씨네 가게에 들렀다. “할머니 추운 겨울 아프지 않고 잘 지내셨어요?” “응, 그럭저럭 지냈지” “이번 설날에도 또 나오셨어요?” “11시 쯤 나와서 오만원 어치 팔고 들어갔지”

  하지만 순임씨는 설날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나려니까 허리가 안 펴지고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엉금엉금 기어서 간신히 장롱 문고리를 잡고 한참동안 허리운동을 하고서야 겨우 걸음이 걸려 나올 수 있었다.

  윤활유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순임씨의 몸은 낮에는 계속 움직이니까 그런대로 괜찮지만 잠자는 동안엔 오히려 뼈마디가 굳어져서 일어나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 아닐까?
 

  “이제 돈은 더 벌어서 뭐에 쓰려고 그러셔요?” 나는 힘들게 나오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러면 “나 요새는 돈 버는 것도 없어” 하시며 빙그레 웃는다. 물건 배달해 주는 용달차 운임주고 장사하는데 필요한 이런저런 물품들 사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집에 있는 것 보다 장사하는 이곳으로 나와 있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신다. 

   순임씨는 일년 365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고 온종일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않는다. 아침 일찍 삼산동 청과물 도매 시장에 가서 그날 판매할 야채들을 골라 용달차에 싣고 가게에 나오면 8시 30분쯤 된다. 용달차 기사가 내려놓은 채소들을 각각 제 자리에 정리하고 주인을 닮은 몽당 빗자루로 순임씨는 가게 주변을 싹싹 쓸고 나서 일을 시작 한다. 철따라 나오는 각종 채소들, 달래, 냉이, 시금치, 들깻잎과 쪽파, 총각무를 다듬는다, 고구마순, 더덕, 도라지 껍질을 벗긴다, 마늘, 풋콩을 깐다. 그의 손길을 거쳐서 다시 태어난 채소들은 본래의 것보다 부가가치가 한 등급 높아진 상품으로 변신 된다. 그것들을 가지런히 진열해 놓으면 순임씨 가게 안은 한층 빛이 난다.

 

   보건 학자들에 따르면 수명의 30%만이 유전과 관련이 있고 50%는 개개인의 생활 방식, 나머지 20%는 경제적 사회적 능력에 좌우 된다고 한다. 은퇴한 후에도 일하는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 산다. 일을 할 때 사회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주기에 외롭거나 지루하지 않다. 또한 몸과 뇌를 연속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의 노화를 늦출 수 있다. 나는 ‘순임씨가 노후에 작은 것일지라도 지속할 수 있어서 저렇게 생기있는 모습을 잃지 않는구나’라고 생각드니 다시 한 번 그녀를 돌아보게 된다.
 

   순임씨는 글을 모른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계집애가 학교에 다니면 연애질해서 안 된다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아무렇지 않게 ‘쿡쿡’ 웃는다. 그런데 물건 값 계산은 얼마나 정확한지 신기하다. 계산법은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1,000만 원이하의 계산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하신다. 아마도 장사를 하면서 돈을 만지다 보니 셈법을 더 쉽게 터득 한 것 같다.


  길게 늘어놓은 야채들을 일일이 집어주지 못하는 그녀는 “우리 집은 뷔페식 이야”하며 필요한 것을 골라 오라고 하신다. 자기의 판매방식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만 보아도 순임씨는 분명 유머와 재치가 있는 재미있는 분이다. 주섬주섬 가지고 가면 돈을 받고 빠르게 계산해서 거스름돈을 내어주신다. 

  지난 초가을에 김칫거리 몇 가지를 외상으로 샀다. 깜박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외상값을 갚으러 갔다. 일부러 얼마냐고 묻자 “열무 한 박스 13,000원, 쪽파 3,000원, 얼갈이배추 4,000원, 모두 20,000원이야”라고 머리속에 전자계산기를 두드리듯 말씀하신다. 요즈음 무슨 일이든지 메모해 놓지 않으면 깜빡 잊어버리는 나에 비해 순임씨의 기억력은 놀랍다.
 

  손을 많이 쓰면 뇌의 퇴화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요즈음 TV에 나오는 건강강좌들을 보면 피아노 치기, 박수치기, 그림그리기, 카드놀이 등 손가락 운동을 많이 권하고 있다. 매일 온 몸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순임씨의 뇌는 결코 퇴화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씩씩한 순임씨에게도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순임씨는 붉은 고추를 팔다가 남으면 그는 그것들을 좌판 옆 인도에 펴놓아 말리곤 했다. 이렇게 며칠 모으면 제법 많은 ‘태양초’가 된다. 어느 날 가게에 가보니 고추가 안 보였다.  
 

   “할머니 고추 다 파셨어요?”하고 물었더니, “어제저녁 널어놓고 들어갔는데 아침에 와보니 누군가가 전부 거두어 갔어.” 라고 하신다. “아니 세상에! 어떤 얌체 같은 사람이 그런 짓을 했을까?”
 

   내가 좀 과장된 목소리로 분개해서 말했더니 순임씨는 별일 없다는 표정으로 “나만 못한 사람이 그랬겠지 뭐” 라면서 또 ‘쿡쿡’ 웃으신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순임씨를 보면서 순간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순임씨가 존경스럽기도 하다.
 

  나물거리를 한두 가지 사면 “그거 무치는데 파를 이만큼은 넣어야 해”하며 다듬던 쪽파를 한줌 집어 나물담은 비닐 봉투에 찔러 넣어 주신다. 온종일 움직이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오고가는 동네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순임씨! 그 맛에 그럴까? 그런 순임씨가 나는 좋다. 연중무휴로 열려있는 두 평짜리 순임씨의 가게는 그의 일터이고, 쉼터이지만 우리들의 놀이터 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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