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대작사건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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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대작사건에 대한 단상
  • 김천권
  • 승인 2018.08.2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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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칼럼] 김천권 / 인하대 교수



 최근 조영남 대작사건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에서 대작이 아닌 협업이고, 이런 행위는 미술계에서 오랜 역사동안 일어났다고 판결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 미술계에서 협업은 오랜 관행이고 때로는 필요에 의해 협업이 있어왔다.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천지창조를 그릴 때, 어떻게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었겠는가? 대가들이 폭 2미터, 길이 5미터 이상의 벽면 전체를 아우르는 그림을 어떻게 혼자서 그릴 수 있는가? 모네의 벽면을 가득 메운 작품 ‘수련’의 크기를 보면 정말 압도적이다. 이런 대작을 그리기 위해서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마칠 수가 없 을 것이다. 그래서 대가들은 수련생을 쓰며 교육도 시킬 겸 작품을 마무리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이런 미술공방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중세시대 피렌체에는 베로키오 공방이 있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여기에서 수련생으로 들어가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대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에는 네덜란드에 렘브란트 공방에서 많은 문하생들이 그림을 그렸고, 렘브란트가 최종적으로 마무리하여 렘브란트 작품으로 팔려나갔다. 최근에는 본인이 만들지 않은 작품에도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불어 넣어져 예술작품으로 주목받은 사례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마르셀 뒤샹의 ‘샘’으로 남성 용 변기가 포스트모던 작품으로 출품되어 미술작품의 본질에 대한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비록 예술가가 직접 그리거나 만들지 않았더라도, 예술적 의미와 창의적 아이디어가 부여 되었으면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하얀 도화지에 점을 몇 개 그려놓고 깊은 의미와 혼을 불어 넣으면 대작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영남의 화투를 이용한 그림들은 조영남만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인정받아, 비록 보조자의 협업에 의해 작품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조영남 작품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계의 협업에는 단순한 아이디어 제공 이상의 또 다른 보이지 않 는 기준(조건)이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렘브란트가 공방을 운영하며 문하생을 교육하고 미술을 배우는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피렌체에서 베로키오 공방이 운영되어 다빈치에게 붓을 넘겨 준 것은 다빈치의 미술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준 것 이었다. 대가들이 대작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협업은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교육과정의 일부였기 때문에 조수의 도움을 받았더라도 대가의 이름으로 작품이 출품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베로키오 보다 처음부터 다빈치가 명성과 기술면에서 우위에 있었다면 베로키오 이름으로 출품될 수 없었고, 렘브란트 제자가 명성과 기술면에서 렘브란트보다 우위에 있었다면 렘브란트 이름으로 출품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조영남의 작품 완성과정을 들여도 보도록 하자.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화투를 이용한 미술작품은 조영남의 독특한 아이디어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조영남의 명성과 아이디어가 합쳐져서 미술품이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조영남이 진정으로 협업한 보조자보다 기술적인 면에서 뛰어나서 최후의 붓 터치만 했던 것인가? 조영남이 명성은 있지만, 이 명성이 화가로서의 명성이었는가? 여전히 석연치 않은 점들이 남는다.



<대작 논란이 일고있는 조영남의 작품. 화투를 이용한 미술작품이다. = MBN 캡처>



 필자의 시각에서 이 작품이 조영남 작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두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협업에서 필수적 작업인 아이디어 창출 기반이 되는 스케치(밑그림)가 남아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작업이 진행된 과정이 설명되어야 한다. 둘째는, 협업을 한 보조자가 조영남으로부터 기예를 전수받는 멘토와 학습생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그것이 아니고 돈에 묶인 관계에서 그림을 그렸다면, 이것은 조영남이 돈을 주고 그림을 주문한 것이고, 작품의 원작자는 실제로 그림을 그린 보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차라리 조영남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보조자의 작품이었다고 처음부터 고백했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진정한 협업이었으면 공동작품으로 하였던지? 그러면 격(가격)이 떨어지나? 도대체 뭐가 뭔지 실마리가 확실히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조영남의 작품으로 인정하기에는 상당히 껄끄러운 기분이 든다.

 예술계는 이번 사건과 판결이 별로 달갑지 않을 것이다. 예술적 행위와 가치문제를 법으로 해석한다는 것이 마땅치 않고, 다른 한편으로 전문화가도 아닌 사람이 명성과 아이디어만 갖고 미술계를 농락한 것 같아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시민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이 사건과 관계해서 미술계에서는 일반이 이해할 수 있는 자체적인 판단과 평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예술계가 워낙 독특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제는 법적 판단에 맡기기 이전에 미술계에서 평가와 판단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 보다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하기는 천경자 작품이나 이우환 작품의 진위 여부도 밝히지 못하는 미술계에 너 무 큰 기대를 한 것일까? 필자 또한 미술계에 있지도 않으면서 어쭙잖은 비평이나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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