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장애인사업장 일군 사회적경제계 스타 경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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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장애인사업장 일군 사회적경제계 스타 경영인
  • 어깨나눔
  • 승인 2018.08.3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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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상 (사)한국근로장애인진흥회 이사장
 


(사)한국근로장애인진흥회 윤기상(57) 이사장은 인천 사회적경제계에서는 스타 경영인이다.
 
지난 2010년 사단법인 형태로 사회적경제기업을 창업한 이후 직원 수 80명, 연 매출 150억원 규모로 성장시켰다. 이 업체에 따라 붙는 수식어도 많다. ‘생산성 최고의 장애인사업장’, ‘임금 수준 최고의 장애인사업장’, ‘조달청 납품등록 1호 비영리사업장’ 등이다.
 
상호에서 알 수 있듯 이 업체는 장애인사업장이고 매출과 복지, 생산성 면에서 최고의 장애인사업장이다. 한마디로 그는 성공한 사회적경제기업 경영자다. 튈만도 한데 그는 모든 게 직원들 덕이고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내내 자세를 낮췄다.
 
“최고경영자라고 직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맡고 있는 일이 서로 다를 뿐이죠. 직원들이 맡은 일을 성실히 해준 덕에 오늘의 회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경영자로서 당연히 감사해야죠. 저는 직원들을 잘 만난 행운아라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사용지, 종이컵, 화장지 등의 종이제품 생산과 인쇄업을 겸하고 있는 이 업체는 제품의 질이 좋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거래 공공기관이 2만개에 이른다. 제품 품질이 그만큼 좋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자가 윤 이사장 인터뷰를 위해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잠깐 대기하는 동안 구매신청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그중 한 통은 충남의 한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복사용지 질이 좋다는 주변의 말을 듣고 거래를 시작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업체 직원 80명 중 50명이 중증장애인이다. 나머지 30명도 대부분 노인, 다문화가정 가족 등 취업 취약계층이다. 모든 게 직원들 덕이라고 공을 돌리는 그이지만 경영자로서 겪은 어려움이 없었을 리 없다. 업무 숙련에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장애 직원들과 함께 하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말못할 어려움도 있었을 터다.
 
“어려움이 아니고 기다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동이 생각대로 따르지 않는 장애 직원들은 일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통 1년 정도 걸리지요. 적응하고 나면 정상인 못지않게 일을 해냅니다. 창업 때 함께 한 직원들이 지금은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 작업 능력에 맞는 생산 장비를 직접 제작해 특허까지 받는 정도입니다.”

 
윤기상 이사장이 공장 견학을 온 장애인단체 회원들을 안내하고 있다. 한국근로장애인진흥회 사업장은 전국 장애인단체의 견학이 잣다.
 

그는 본래 반도체 엔지니어였다. HDD(하드디스크드라이브) 신기술을 도입한 중견기업에서 일하며 해외 신기술을 국내 기업에 전수하는 역할을 했다. 해외를 안방 드나들 듯 오갈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다 HDD가 SSD(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로 점차 대체되고 IMF사태까지 겹치면서 회사가 어려워져 2000년에 퇴사하게 됐다.
 
이후 개인사업을 하다 경기도에 있는 사회적기업에 총괄이사직을 맡아 취업한 것이 인천에서 장애인사업장을 창업한 계기가 됐다.
 
“사회적기업에 대해 잘 모르고 취업했는데 일을 하면서 도전해 볼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천에 특별한 연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사회적기업 제도가 도입된 초창기였고 서울이나 경기도에 비해 인천에 사회적경제기업의 수가 적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인천이 활동 공간이 넓을 것이라고 판단했죠.”
 
그는 2009년 인천 남동구에 공장을 임대해 터를 잡고 2010년 4월 직원 7명과 함께 창업의 길에 들어섰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산, 품질관리, 판매, AS까지 꼼꼼히 계획을 세워 생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판로 문제에 부딪혀 이내 곤경에 처했다.
 
“창업 이후 딱 한번 후회한 적이 있는데 이 때였습니다. 판매가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이익이 나지 않아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직원들 봉급이 우선이다 보니 제 봉급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죠. 아예 직원 등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사에 적을 올리지 못하고 무급으로 일한 시간이 3년. 공장도 임대료 부담 때문에 2011년 서구 당하동 지금의 자리로 옮겨야 했다. 같은 인천이지만 출·퇴근 거리가 멀어 그만두는 직원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단 한명도 그만둔 사람이 없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어 출·퇴근이 쉽지 않은 데도 저를 믿고 따라왔으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회사가 잘못돼서 직원들이 그만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뛰었죠.”

 
한국근로장애인진흥회 직원들이 지난 4월 일본 대마도 해외연수 여행지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판로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2012년에 따낸 조달청 납품등록이 회사 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주문이 들어오면서 공장이 돌아가고, 제품의 품질이 확인되면서 주문이 더 늘어나는 선순환구조가 마련됐다. 생산이 주문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도였다.·
 
“주문은 쏟아지는데 생산 설비는 단시간에 늘릴 수 없어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물건을 제 때 대지 못해 조달청 등록이 정지되는 위기까지 겪었습니다. 그 위기도 직원들 힘으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요청한 것도 아닌데 새벽 3~4시까지 일을 해 주문량을 소화했어요. 놀랐죠.”
 
직원들에 대한 그의 대우는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각별하다. 장애인사업장 최고 수준의 임금은 물론 매년 단체 해외연수의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해에는 일본 오사카, 올해는 대마도를 다녀왔다. 지난해부터는 주거 지원도 시작해 올해 직원 한명에게 전세금 7천만원을 무이자로 제공하고, 출·퇴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또 한명에게는 회사 근처의 주택을 회사 이름으로 임차해 매월 50만원의 월세를 내주고 있다.
 
“직원들에 대한 보답입니다. 직원들의 노력으로 회사가 이만큼 성장했으니 그 과실이 직원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장애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직원들이 많아요. 모두 편안히 살수 있도록 주거 지원을 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계획이라면 그 것입니다.”
 
앞으로 계획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의 답은 그랬다. 이 회사는 생산과 판매, 경영의 선순환구조가 갖추어지기 전에 경영자와 직원들 간 믿음의 선순환구조가 이미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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