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동네'는 옛 영화(榮華)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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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동네'는 옛 영화(榮華)일 뿐이고…
  • 김도연
  • 승인 2010.02.01 20: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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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④ 중구 율목동
인천에서 '부자 동네'가 어디냐고 물으면 지금은 대부분 송도신도시를 꼽는다. 고가(高價)의 아파트가 대규모 단지로 줄지어 있고, 국제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는 등 '화려한 동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50대 이상에게 물으면 거의 대부분 중구 율목동(栗木洞)을 꼽는다. 이 곳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인근 내동과 함께 인천의 부자촌으로 불렸다고 한다.
 
'으리으리한' 전통 기와집도 꽤 많아 서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을 정도였다.

당시 이곳에는 부산과 대구 등 영남지역에서 인천으로 올라와 능숙한 일본어를 앞세워 곡식 중개업 등을 하며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살았다. 

율목동은 주택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한산했다. 그래서 지금 율목공원이 있는 언덕배기에는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공동묘지는 1960년대 한일 국교정상화 후 일본인들이 유해를 인수해 가면서, 율목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장장도 있었다. 이 화장터는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도원동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화장터가 옮겨가고서는 한옥주택가가 생겼다. 그리고 인천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 잇따라 율목동으로 이사를 한 뒤 '부자 동네'로 불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 영화(榮華)에 지나지 않을 뿐, 이전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밤나무골과 버드나무골

중구에서 가장 장은 동인 율목동은 법정동인 율목동과 유동을 포함하고 있다. 

중구 내에서 가장 면적이 작고, 인구 수도 적은 동네인 율목동에는 율목동과 유동(柳洞)이란 두 개의 법정동이 있다. 모두  합쳐봐야 면적 0.5㎢에 2천170여 세대 5천200여 명이 산다.
 
율목동은 낮은 산자락에 위치한 동네다. 가장 꼭대기에는 어린이공원이 있고, 그 아래 서해로에 이르는 경사면에 2천여 세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다.
 
유동삼거리와 신흥동사거리 사이의 서해로를 기준으로 동주민센터가 있는 곳이 율목동이고, 반대편 길 건너가 유동이다.
 
율목동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송림리 지역으로, 제물포 지역에 부내면이 생기면서 이곳이 면소재지가 됐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율목리가 됐다.
 
이름 그대로 밤나무가 많은 언덕에 생긴 마을이어서 율목동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현 율목 어린이공원이 위치한 언덕 꼭대기 주변으로 밤나무가 많이 자라서 예전부터 밤나무골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 때는 율목리·율목정으로, 해방 후부터는 율목동으로 됐다.
 
한 때 밤나무가 많았다고 하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지역이 개발되고 빌라들이 빼곡히 들어서 오늘날에는 밤나무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동네 꼭대기 어린이공원에 가야 겨우 몇 그루 만날 수 있을 정도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지명(地名)이 세월이 흐르면서 이름다움을 잃어버린 셈이다.
 
그나마 밤나무골이었다는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지역 축제뿐이다.
 
동주민센터 이기만 사무장에 따르면 율목동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2008년부터 매년 가을, 밤으로 유명한 공주 정암면과 자매결연을 맺고 밤을 가져다 팔기도 하며 다양한 행사를 마련해 밤나무골 축제를 열고 있다.
 
유동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송림리에 속해 있던 곳이다. 1903년 인천부에 부내면이 생기면서 이 지역은 부내면 우각리(牛角里)로, 1906년에는 우각동으로 됐다고 한다. 이 우각동이 1912년 경인철도가 동네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우각리와 유정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해방 후부터 유동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유동이란 이름은 버드나무가 많아 붙여진 것으로, 유목동이라고도 했고 우리말로는 버드나무골 또는 버들골로 불렸다.
 
인천의 '부자 동네'는 이제 옛말

율목동이 한때 부자동네였음을 증명하는 전통 한옥. 지금은 한 채만이 존재한다. 

율목동은 1910년대부터 바로 인접한 내동과 함께 인천의 부자촌으로 이름을 날리던 동네이다.

유동에서 30년 이상 삼원한약방을 운영하는 윤병옥(79) 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을 때만 하더라도 일제 강점기 때 지어졌던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윤 원장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율목동은 인천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지금은 빌라들이 빼곡히 들어서 부자 동네라는 이미지를 찾아볼 길이 없다"고 말했다.
 
현재 율목동의 전통 기와집으로는 동주민센터에서 율목 어린이공원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한 채가 유일하다.
 
언제 지어졌는지 모를 이 전통 기와집에서는, 비록 철제문이 달린 빨간색 벽돌담으로 둘려 있지만 까치발을 세우면 담 너머로 목제 대문을 볼 수 있고, 목제 기둥사이를 시멘트로 메운 벽체와 그 하단을 받치는 화강석 돌 벽 등을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보수를 했겠지만, 아마도 그 옛날에는 전통 방식 그대로 지어졌을 기와집으로 보인다. 여전히 지붕은 전통 기와가 얹어진 모습 그대로다. 옛날에는 소위 말하는 떵떵거리는 부자가 살았을 만하지만, 지금은 주변으로 두서너 배 이상 키 큰 빌라들이 들어서 왠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다.
 
윤병옥 원장의 기억에는 197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주변으로 ㄱ자나 ㄷ자, 또는 ㅁ자 형태의 전통 기와집들이 예닐곱 채 이상 있었다니 당시에는 '부자 동네'라는 이름이 어울렸을 법하다.
 
전통 기와집을 뒤로 하고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어린이공원이 나오는데, 이 일대가 동 이름을 짓게 한 '밤나무골'이다.
 
나이 지긋한 동네 어른에게 물으니 당신이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 밤나무 고목이 꽤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고목이라 불릴 만한 나무가 한두 그루 있을 뿐이다. 동네 이름 값을 하려고 사람들이 심은 밤나무 수십 그루가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수령 10여 년밖에 안 된 이들 밤나무는 키 작고 두께가 얇아 아직은 별로다.

율목동을 대표하는 밤나무는 현재 율목어린이공원에서나 볼 수 있다. 

어린이공원은 1996년에 준공됐는데, 1992년 공원 조성을 본격화하기 전에 이곳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1944년 공원으로 결정된 이후 1970년 12월 '풀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율목동의 현 모습에서는 과거 밤나무가 많았다는 걸 생각하기도 어렵거니와, 동네 사람들이 이곳에서 수영을 즐기는 걸 상상하는 일은 힘들다.
 
인천시립도서관은 어디로?

예전 인천시립도서관 모습. 사진제공 인천시역사자료관 

율목 어린이공원 꼭대기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다. 그 철망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인천 최초의 공립도서관인 구(舊) 인천시립도서관이다.
 
시립도서관은 1921년 11월 1일 지금의 자유공원 내에 있었던 '청광각'을 관사로 사용하면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2년 1월 6일에 장서 900권을 갖춘 인천부립도서관으로 개관했다.
 
그러다가 해방 후인 1946년 지금의 율목 어린이공원 뒤편에 위치한 일본 정미업자의 별장으로 이전했으며, 1962년 신관을 준공해 2008년 말까지 운영했다.

구 인천시립도서관은 현재 율목동 도서관으로 리모델링 중이다. 

인천시립도서관은 지난해 6월 23일 남동구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이름을 '미추홀도서관'으로 바꿨다. 구월동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시립도서관에는 20만 권이 넘는 장서가 있었으며 연간 17만 여명이 이용했다.
 
지금은 곳곳에 도서관이 문을 열고 운영하지만, 1980년대 전에는 이곳 시립도서관이 인천에서 유일했다. 여기서 책을 벗삼아 공부를 한 이들은 각계 각층에 널리 퍼져 일을 하고 있을 터이다.

인천시립도서관 입구에는 지금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다. 율목동도서관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건물 리모델링 중이어서 사람의 발길을 막고 있다고 한다.
 
좀 낡아 보이긴 해도 1962년에 세워진 신관 건물은 멀쩡하다. 신관 뒤편으로는 일본인 별장에서 도서관 건물로 바뀐 일제 강점기 시절 목조 건물도 그대로 남아 있어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다.
 
구 시립도서관에서 배다리삼거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인천의 대표적 의료기관 가운데 한 곳인 기독병원을 만날 수 있다.

1952년 율목동에 세워진 인천기독병원.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병원은 길병원이나 인하대 병원보다 훨씬 전인 1952년(율목동 237번지)에 세워졌다. 세월이 지나며 건물의 규모가 조금씩 늘어 갔지만 위치는 예전 그대로다.
 
이 동네 어른들은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동주민센터 건너 지금의 보건환경연구원 자리(동 경계 상으로 신흥동에  속한다)에 있던 인천시의료원보다 기독병원이 낫다고 할 만큼 병원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고 기억한다.

기독병원에서 '가구거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배다리 맞은 편에 정보산업고등학교를 만난다. 이 자리에는 본디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인천고등학교가 있었다.
 
올해로 개교 115주년을 맞는 인천고는 교사(校舍)가 낡았다는 이유로 1971년 남구 주안4동에 새로운 학교를 지어 옮겨 갔다. 후에 상술하겠지만, 인천고는 장구한 역사만큼이나 각계에 지도적 인물을 수없이 배출한 명문고로 잘 알려져 있다.     
 
소시민들이 사는 작은 동네
 
율목동이 한때 부촌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전혀 찾아 볼 길 없다.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한 상가도 별로 없는 주택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들도 대부분 다세대 주택이어서 부자들이 사는 동네라고 하기에는 어줍다.
 
그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개발을 거쳐 부자 동네였던 시절보다 세대나 인구는 늘었어도, 지금은 소시민들이 많이 사는 구도심의 '주거 밀집지역'이다.

한때는 서해로 주변으로 상가 건물들이 있어 상권도 형성됐으나, 도로 확장 공사를 할 때 모두 없어져 주택가 기능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지역 내에 재개발조합이 구성되는 등 '개발 바람'이 일고 있어 서해로 주변으로 새로운 집과 공원 등이 들어서면 주거 환경은 조금 나아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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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주 2010-02-09 08:50:01
율목동에 대한 상세 설명 감사합니다.에전엔 밤나무가 많아을꺼라는 것만 한문 글자로 짐작만 했었는데 고맙습니다.앞으로도 인천의 여기 저기 요모조모 안내 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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