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서 태어난 연개소문
상태바
강화도에서 태어난 연개소문
  • 이한수
  • 승인 2018.10.02 0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 SBS 드라마 [연개소문], 주영숙 장편소설 [신연개소문]

 
강화도 하점면 부근리 연개소문 유적비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고 곧바로 관미성을 점령하여 혈구도(강화도)는 고구려의 남방 거점이 되고 한강 유역 일대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장수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펴 한성(서울)까지 장악하고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천도한다. 5세기 내내 한강 유역은 고구려 지배하에 있다가 6세기 중반 551년에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 영토를 회복하지만 곧바로 신라는 맹약을 깨고 한강 유역 지배권을 독차지한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서해 해상권을 갖게 되면서 당나라와 교류하게 된다.

6세기 무렵 한반도 북방 지역은 부여족의 고구려와 선비족의 위, 연, 수가 서로 얽혀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고구려와 위가 연합하여 연나라를 패망시키고 난 뒤에 선비족은 수나라로 다시 통일국가를 세우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금방 망하고 만다.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도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구려 변경을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당나라 황제 이세민은 고구려 침략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앓다가 사망하면서 고구려는 요하 유역을 포함한 만주 일대를 장악하게 되고 한반도 쪽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이 일을 이뤄낸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은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시킨 강대한 수, 당 제국을 물리쳐 우리 민족 강역을 지켜낸 위대한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내고 우리 민족을 통합시켜 고토(故土)를 회복해낸 위대한 업적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 기록이 대부분 망실되고 만 것은 우리 민족사의 크나큰 비극이다.

강화도 고인돌 유적지 근처에 연개소문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 비문에는 연개소문이 “강화군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馳馬)대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으며 …… 지금도 이곳에는 그가 출생하였다는 옛터와 자취가 남아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치마대와 오정이 있는 고려산은 봄이면 진달래가 온 산을 뒤덮어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곳이다. 진달래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지만 이곳에서 민족의 영웅 연개소문이 말을 달리고(馳馬) 성산(聖山)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우물(五井)을 마셨다는 전설을 들으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강화도는 참 신비한 땅이구나! 우리 민족 국가 시조의 성지이기도 하고 드넓은 대륙을 호령한 영웅의 탄생지라니······.
강화도 고려산 전경
 

연개소문이 태어날 무렵 아시아 대륙의 판도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흉노(훈족) 대제국이 무너지면서 선비족이 점차 강성해지는데 5호16국 분열기가 끝나면서 중국 북방 지역은 선비족에 의해 통일되어 나간다. 선비족에 의해 세워진 북위는 수나라 당나라로 계승되는데 7세기에 접어들어 당나라는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영류왕은 당나라 황제 고조와 친선 정책을 펴면서 굴종적인 모습을 보여 고구려 내부 강경파의 비난을 사게 된다. 영류왕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때 잡아둔 포로를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당 고조에 이어 태종 이세민이 집권하자 판세가 급격히 달라진다. 이세민은 북방 돌궐을 침략하고 고구려를 위협하면서 북방 정벌을 노골적으로 추진했지만 고구려 영류왕의 온건파는 굴욕적인 대당 친선정책을 유지한다. 연개소문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음을 설파하지만 오히려 반대세력에 의해 제거당할 위험에 처한다. 그는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면서 당나라와 전쟁도 불사하는 강경책을 천명한다.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당 연합을 모색하고 백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백제와 전쟁 중인 신라와는 동맹을 거부하고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모색한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나라와의 연대를 꾀한다. 이를 두고 동족을 배신하고 이민족을 끌어들였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당나라 지배집단이 우리 민족의 일파라는 반론이 있기도 하다. 신라의 김씨 왕조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과 같은 혈족이라는 학설이 있는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연맹관계를 맺지 못하고 당나라와 연합하게 된 데에는 이런 혈족 관계에 기인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전래 설화에서도 전해지듯이 백제는 고구려 종족에서 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 돌궐족의 일파이며 신라는 선비 흉노족의 일파라고 보면 삼국시대 국가 간 연맹관계가 이해된다.

 
투르크 유적지 벽화의 고구려 사신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중앙집권체제로 정비하고 북방 정벌에 나선 당나라와 대결하게 된다. 남으로는 백제와 연맹을 맺고 서방 돌궐과 연합전선을 모색한다. 연개소문이 사신을 파견한 돌궐은 6세기 중반에 동유럽과 동아시아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한 투르크 제국이다. 투르크 제국은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의 최강국 오스만투르크로 이어졌으며 현제 터키라는 나라로 남아있다. 우리 역사서 [단군세기]에는 훈 제국, 투르트 제국, 몽고 제국을 일으킨 종족은 모두 조선족에서 분화해간 종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제 터키어와 몽골어는 우랄알타이어로 같은 언어 계통에 속하며 비교언어학 연구에 의하여 기본 생활 용어는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는 게 확인되고 있다. 연개소문은 이런 조선족의 여러 갈래를 통합시켜 당나라를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면서 약화되어 가고 있는 조선족을 다시 통합시켜 중국 대륙을 회복하려고 한 통 큰 민족 영웅이었지만 우리 역사 기록은 그를, 정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권력을 독차지한 패륜아로 폄훼하고 있다. 나당연합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에 의해 기록된 역사가 연개소문을 긍정적으로 기술할 리 만무하다. 백제와 전쟁을 하면서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 적이 있고 당나라는 연개소문 때문에 북방 정벌이 좌절되었으니 두 나라의 연합으로 정복한 나라의 지도자를 헐뜯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고려 때 북방 고토 회복을 주장하는 ‘묘청’을 반역자로 몰아 죽이고 사대주의를 견지했던 김부식이었으니 그가 연개소문을 좋게 볼 리가 없다.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아주 흉측한 반란자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에 대해 김부식과 전혀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그가 직위를 계승하더니 흉포하고 잔인하여 무도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것이 그만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자기 부의 군사를 전부 모아 마치 사열하는 것처럼 하고, 동시에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사열하기를 권하였다. 손님들이 오자 그는 그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사망자가 모두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궁중으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여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 그리고는 왕의 동생의 아들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이 관직은 당 나라의 병부 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한다.”
- [삼국사기] 열전 ‘연개소문’ 중에서 -

"연개소문은 첫째로 고구려의 9백년 이래로 전통적인 호족통치의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고, 둘째로 장수왕 이래로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의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의 정책을 세우고, 셋째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죽이고 자가의 독무대를 만들어 서국의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여 지나 대륙에 침략을 시작하였으니, 그 선악, 현부(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에 고구려 뿐 아니라 곧 당시 동아세아의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인물이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중에서 -

연개소문의 업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왜 이렇게 다르게 되었는지, 무엇이 진실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너무도 지난(至難)하다.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고 고려시대에는 신라 왕족 출신 김부식이 주도한 한학파에 의해 고구려 회복을 추구했던 국풍파가 제거되었으며 조선은 창건하면서 친명사대에 빠졌으니 우리 역사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일제의 역사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가 송두리째 망실되는 치욕을 겪었다. 연개소문에 대한 국내 역사 기록은 대부분 잃어버렸으며 극소수 남아있는 기록들은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연개소문의 젊을 시절을 형상화하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일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외한 역사 기록으로 조선 후기에 써진 [강도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변국의 기록들이다. 우리 역사 기록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의 선대에 대한 기록까지 남아 있지만 강단사학계에서는 이 역사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국 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 아들 연남생의 묘지에 기록된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사료를 근거로 한 신채호의 역사 서술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한 대부분의 사극들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바탕으로 그려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연개소문 사극으로는 SBS 드라마 [연개소문]을 첫손에 꼽는다. 

드라마 [연개소문]은 막리지 연태조(연개소문 아버지)와 동생 ‘연태수’의 권력 다툼을 피해 연개소문이 어릴 때 신라로 피신해 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연태수’에 대한 유일한 기록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수나라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출중한 무예로 귀족들의 눈에 들게 되고 나중에 당나라 황제가 되는 이세민과 젊은 시절 친구로 지낸다. 살수대첩으로 고구려에 대패한 수나라가 붕괴의 위기에 처하자 이세민은 연개소문에게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제안하지만 연개소문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세민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세우고 연개소문은 당나라를 떠나 고구려로 간다. 이 스토리는 당나라에서 써진 [규염객전]이라는 소설과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언급한 중국 소설 [갓쉰동전]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다.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
 

주영숙 소설 [신연개소문]도 연개소문이 어릴 때 아버지 슬하를 떠나 수련생활을 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를 중심으로 한 남수북공(南守北攻)파와 친 당나라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북수남공(北守南攻)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연태조는 당나라를 제압하기 위해 신라 백제와 동맹하고 돌궐과도 친선 외교 관계를 터기 위해 아들 연개소문을 사신으로 파견한다. 연개소문 집안이 남방 백제와 친선을 주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어떤 사료에는 연태조가 동부대인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다른 역사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연개소문 집안은 고구려 5대 부족 중 연나부에 속해 있었으며 연나부는 고구려의 서부 지역, 요하 발해만 지역이니 연태조는 서부대인인 것이 타당하다.

연개소문 집안이 연나부에 속해 있었다면 연개소문이 어린 시절 강화도에서 수련 생활을 했다는 [강도지]의 기록은 사실로 추정될 수 있다. 연나부는 백제를 세운 소서노의 출신 부족인 소노부와 한 부족이나 마찬가지였고 북방의 돌궐족과 수나라,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과도 인접해 있었다. 따라서 사극이 그리고 있는 연개소문의 젊은 시절 수련생활과 친선 외교 활동은 당시 정세에 부합되는 사실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부족연맹체로서 현대의 국가체제와는 많이 다른 만큼 현대적 시각으로 고대 역사를 제단해서는 안 된다. 국가체제가 성립되기 전에는 부여족, 선비족, 돌궐족 등 여러 부족 간 이합집산이 매우 복잡했고 민족 개념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중국 대륙의 여러 부족이 당나라로 통일되고 만주 대륙을 고구려가 통합시켜 나갈 때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고 그 대업을 이룬 영웅이 광개토대왕과 연개소문이었다. 고구려가 당나라를 제압한 안시성 전투가 최근 영화로 만들어져 고구려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이끌게 된 건 큰 의미가 있다. 우리가 고구려사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는 걸 뼈저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연개소문이 후대의 역사 망실을 꾸짖는 형식으로 써진 황원갑의 단편소설 <대막리지의 분노> 일독을 권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