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벗어난 단어 '혐오',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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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난 단어 '혐오', 괜찮을까?
  • 안정환
  • 승인 2018.12.0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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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안정환 / 연세대 의공학부

 ‘엽기(獵奇)’라는 단어를 아는가.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일을 일컫는 형용사로 과거에는 ‘엽기살인사건’, ‘엽기적인 행태’ 등 일상을 벗어난 범죄사실을 부각하는 단어로 쓰였다. 하지만 이후 ‘엽기토끼’라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히트를 치면서 엽기’는 우리의 일상에서 조금 희한하고 재밌는 것에 붙이는 평범한 단어로 재해석되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분식집 ‘엽기떡볶이’ 등으로.
 

  엽기가 일반적으로 쓰인지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엽기의 전철을 밟으려는 단어가 있다. 바로 ‘혐오(嫌惡)’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을 때 주로 ‘싫어한다’거나 ‘별로다’라고 표현한다. 혐오는 적국에게 적의를 불태워야 할 때나, 더럽고 추악한 것을 빗대어 쓰여 왔다. 사람에게 쉽게 대입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요즈음 ‘극혐(극도로 혐오한다)’이라는 인터넷 신조용어가 생겨나면서 미취학 아동부터 어른까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한 감정을 생기게 만드는 주체에게 혐오라는 단어를 날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수가 소수에게, 소수가 다수에게 거침없이 드러내는 혐오의 표현은 젊은 세대에게는 위험하게도 유행의 표시이자 표현의 방법으로 치환된다.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도 익살스럽게 사용할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닌가라는 시선도 있지만 일상을 벗어난 단어들의 보편화는 정말 괜찮을지 의문이다.

 

  몇 달 전부터 이어진 탈코르셋 운동과 여성 인권 신장이라는 구호 하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시위는 많은 ‘혐오’를 야기했다. 온라인은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고 어떻게든 서로의 감정을 꼬집고 헤집어놓으려는 악독한 문장으로 범벅된 자극적인 사진과 동영상의 향연이 이어졌다. 자신의 뜻에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자들에게는 ‘용자’나 ‘깨어있는 사람’으로 표현했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개돼지들’이나 ‘흑우(호구)’라 칭하며 철저한 편 가르기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서슴없이 내보였다. 인터넷 어느 커뮤니티를 가도 여성과 남성에 대한 문제는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녔고 매몰된 사고로 펼치는 주장에 숨겨진 강렬한 적의는 섬뜩할 정도였다.

  비록 이것이 극단적인 예시일지라도 혐오라는 감정이 유머로 포장되어 쓰이는 것이 우리들의 의식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로를 향한 적개심을 인터넷에 푸는 것도 예전부터 있어왔고, SNS를 거친 인터넷 신조용어들도 늘 생기고 사라져왔다.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이때야 말로 무분별한 표현의 재구성에 제동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닐까.
 

  혐오의 유의어는 증오, 타기, 혐의가 있다. 이러한 흐름대로라면 언젠가 증오와 업신여김을 뜻하는 단어들도 유머로 포장되어 우리와 이 땅에 자라나는 아이들의 의식 속에 깊이 침투할지 모를 일이다. 서로를 향한 적개심과 혐오가 당연시되고 유머로 치부되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일까. 지금이야말로 각자의 의식에 경종을 울리고 무분별하게 재구성된 표현의 바다에서 확실하게 노를 잡아야 할 때다. 우리의 정체성을 붙잡고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을 꿋꿋이 버틸 수 있을 때, 우리는 혐오의 시대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사회는 쉼 없이 변화하고 그 사회를 대변하는 언어나 생활상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인다. 언어는 그 시대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징표 중 하나지만 건강한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의 공식을 갖는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그 표현에 있어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표현의 자유는 그런 건강한 기조 위에서 발생할 때 비로소 제 몫을 다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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