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에서 바라본 강화의 천험(天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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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서 바라본 강화의 천험(天險)
  • 황효진
  • 승인 2018.12.0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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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염하강 철책길을 걷다 - 황효진 /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

<김포 염하강 철책길에서 바라본 강화 천험>


12월 첫날 이른 아침 [인천in]이 주관하는 제39차 터덜터덜 걷기 행사에 참여했다.
예로부터 물살 험하기로 소문난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강화해협(속칭 염하강)을 따라 걷는 철책길이었다. 김포 대명포구에서 덕포진과 손돌목을 거쳐 강화대교 앞 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지는 약 14킬로미터 삼십오리 산길이요 들길을 터덜터덜 걷는 트래킹 코스였다.

염하강 철책길의 다른 이름은 평화누리길이었다. 출발점인 대명포구을 돌아서자마자 날카로운 쇠가시 모자를 둘러쓴 거대한 철책이 나타났다. 귀로는 파도 소리를 듣고 발로는 모래사장이나 자갈을 밟으며 걷는 낭만의 길은 커녕 철책 넘어 물가 근처에도 못갈 뿐 아니라 당장이라도 ‘공비’가 침투하여 군인들이 비상 출동할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었다. 38년 전 자대 배치를 받자마자 잔뜩 긴장하며 정훈장교와 순시하던 중부전선 최전방 철책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철책 따라 30분 정도 오르락 내리락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바다와 하늘이 보였다. 철망 사이로 보이는 바닷물 위에서는 청둥오리들의 자맥질 파문이 일고 있었고, 거칠 것 없는 하늘 위로는 기러기 떼들의 군무가 간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에는 영광이, 바다에는 평화가 넘쳤다. 그러나 땅길은 그렇지 못했다. 철책길에서 한눈을 팔면 옷이 찢기고 손발에 상처를 입을 판이었다. 사진을 찍겠다고 철책 가까이 접근하다 쇠가시에 눈이 찔릴 수도 있었다. 염하강 철책길은  ‘길이 아니면 가지 못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길이였다.

그런데도 염하강 철책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가슴 벅찬 감동이 찾아 왔다. 철책길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역사적 사건이란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기 때문이다. 38년전 경험한 중부전선 철책길과 지금 걷고 있는 염하강 철책길은 철책이라는 외형에서는 하나도 다른 게 없지만 일반인이 마음 놓고 다닌다는 점에서 사뭇 다른 길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철책이 녹슬 듯 사람의 마음도 녹아내려 긴장의 끈도 닳아 없어지는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이 땅 위에 평화의 기운이 훌쩍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오늘 철책을 걷고 있지만 내일 철책을 걷어두면  염하강 철책길은 청둥오리와 기러기  뿐만 아니라 들짐승마저 철책 쇠가시에 상처입을 걱정없이 맘껏 뛰노는 평화의 누리가 되리라.






강화의 천험을 다시 생각한다

대명포구에서 문수산성 남문에 이르는 14킬로미터를 네 시간에 걸쳐 걷는 동안 염하강 건너에서 우리 일행을 줄곧 따라다니던 게 하나 있었다. 면적은 서울의 1/2에 해당되는 300제곱킬로미터이고 해안선 길이는 103킬로미터나 되는 우리나라 네 번째 큰 섬 강화도다. 섬 안에서는 도저히 섬으로 느낄 수 없는 강화도의 진면목인 ‘섬‘ 모습을 섬 밖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새우잡이 배가 다니는 염하강 건너편 강화 해안에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곳 등이 진을 치며 열병하고 있었고 그 뒤로는 마니산, 혈구산, 고려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위엄을 보이며 진좌(鎭坐)하고 있었다. 염하강 철책길 코스 끝자락 문수산성 입구에서는 강화 읍내에 있는 고려 도성도 보일 듯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여러 강을 끼고 있는 강화(江華)는 이름 그대로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강화도는 예로부터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섬이 아니었다.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강화도의 신성(神性)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지리적으로는 육지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길목에 가로놓여 있는 강화 해협의 물살 세기가 그 원인이었다. 북쪽 월곶에서 남쪽 황산도까지 24킬로미터에 걸친 해협의 큰 고저 차이로 거센 급물살이 만들어졌고 조석간만의 차이 또한 해협의 물살을 더욱 거센 급물살로 변모시켰다. 바로 이 거센 급물살이 육지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아서는 험준한 바다 울타리를 만든 것이다. 해협을 끼고 누운 강화, 범인의 접근을 금하는 천험(天險)이 된 것이다.

강화는 천험의 효력을 톡톡히 본 바 있었다. 13세기 고려의 수도가 송도에서 강화도로 천도되었다. 몽고의 침입을 피한 채 40년간 강도(江都)가 되었다. 천험 덕분이었다. 17세기 호란 때에는 행궁터요 피난처가 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여진족 ‘오랑캐’를 피해 인조가 강화로 몽진(蒙塵)하였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병자호란 때에는 세자빈 강빈, 원손, 봉림대군 등 왕족과 김경징을 비롯한 권신들이 그곳으로 대피하였다. 그 또한 천험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천험의 효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려 무신정권의 강화도 천도가 과연 누구의 안전을 담보하였는가?
강도 안에 나라의 무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무방비 상태로 외적의 침탈에 노출되었다. 이것이 강도 천도 40년 동안 강도 밖 일반 백성들이 몽고군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섬 안 권력자들이 도탄에 빠진 섬 밖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단 한번이라도 감행한 적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섬 안의 평화만 있었을 뿐이었다. 강화의 천험은 나라의 일부인 섬의 안전이 되었을 뿐이고 그를 제외한 나라 전체는 오히려 위험 속으로 빠뜨린 게 아닌가 싶었다. 강화의 천험은 백성을 위한 국가 안보가 아니라 권력자들만을 위한 정권 안보로 악용된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 뿐 아니었다. 강화의 천험이 오남용된 적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을 온 김경징 강화 감찰사는 강화의 천험으로 청나라 군대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 섬으로 침입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전란 중 강화의 수비를 책임진 그는 강화도를 금성탕지(金城湯池), 즉 쇠로 만든 굳건한 성벽과 끓는 물로 채워진 해자가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믿고 적전(敵前) 분열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주지육림 향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북경을 함락해 제국의 기반을 다진 청나라 구왕(九王) 도르곤이 이끄는 군대는 강화의 천험을 손쉽게 넘어섰다. 피할 곳 없는 백성들은 순식간에 외적의 어육이 되었다. 김경징의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그의 부인조차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험의 수명이 이미 끝나 있었다. 멸공봉사(滅公奉私)의 상징, 김경징의 무지와 오만의 대가가 컸다.

염하강 철책길을 한 시간 정도 터덜터덜 걷다보니 염하강에서 가장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손돌목이 나타났다.
1232년 고려 고종 일행이 강화도로 건너가기 위해 당도한 곳이기도 하다. 음력 10월 20일 매서운 추위에 바람마저 강하게 불던 날. 임금 일행이 탄 손돌의 배가 전복될 위험에 처했다. 임금은 손돌이 자기를 죽일 계략을 꾸미지 않았나 의심하였다. 임금은 지체없이 주사(舟師) 손돌의 목을 날렸다. 그러나 숨을 거두기 직전 손돌은 안전한 항로를 임금에게 알렸다. 마침내 고종 임금 일행은 손돌목 맞은편 광성보 근처 나룻터로 무사히 건너갔다.
손돌의 살신성인 덕분이었다. 손돌의 넋을 기렸다

도도히 흐르는 염하강에 묻는다. 천험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천험은 영원한 것인가?



<주사(舟師) 손돌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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