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지금도,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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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지금도, 메리크리스마스
  • 유동현
  • 승인 2018.12.2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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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답동성당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의 발자국을 남긴 모교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개항 후 싸리재 주변은 온통 중국인들이 경작하는 양배추 밭으로 바뀌었다. 한쪽 언덕에 주변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물이 하나 서 있다. 1897년 파리 외방선교회가 지은 제물포본당(답동성당)이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1892년 건립)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이다.

 
1958년도 동산고 앨범.
 

1889년 파리외방전교회는 제물포항을 포교지로 정하고 빌렘신부를 파견했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를 주고 사형당할 때까지 도움을 준 분이다.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뮈텔 주교는 이날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7시경 신부들이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성당의 강복식이 거행되었고, 다시 미사와 81명의 교우들의 견진이 있었다. 성당은 매우 아름답고 성공적인데,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효과를 내는 유리면과 교우들의 반은 앉을 수 있는 의자들도 갖추었다…본당의 야산과 밭들은 다 조선 사람들에게 세를 주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요술처럼 훌륭했다.”
 

1956년도 인천여고 앨범.


1965년도 인천고 앨범. 푸른 눈의 신부님까지 함께 찰칵.
 

세월이 흘러 신자수가 급격히 늘자 1934년 개축공사를 시작했다.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난공사 끝에 마침내 1937년 로마네스크식의 성당이 세워졌다. 이것이 현재의 답동성당이다. 정면과 좌우에 반원 아치를 두고 중앙탑 꼭대기와 양측의 작은 철탑 위에 뾰족 돔을 얹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인천 앞바다가 고즈넉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답동성당은 인천의 온갖 풍상을 함께 겪으며 동고동락해온 인천의 산 증인이다.

 

1968년도 인천공고 앨범.

 
서울에 명동성당이 있다면, 인천에는 답동성당이 있다. 높은 빌딩이 많지 않았던 시절 인천시내 어디서든 답동성당 첨탑을 볼 수 있어 시민 누구에게나 경건함을 느끼게 했던 건물이다. 웬만한 학교의 빛바랜 앨범 속에 한 컷이라도 들어 있는 성당이다. 종교를 떠나 학생들은 이 언덕에 올라 친구들과 성당 앞에서 함께 포즈 취할 길 좋아했다.

‘답동’이란 이름은 1977년 신포동에 편입되어 이제는 법정동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답동이라 부르는 것은 그 중앙에 우뚝 서있는 이 답동성당 때문일 게다. 50년 전 앨범 속 친구들 모두 메리크리스마스!!! 복된 성탄 되시길...

 

1978년도 인천수고 앨범. 사람은 바뀌어도 그 뒤의 성당은 한결 같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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