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동안 함께 달린 ‘기차 절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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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함께 달린 ‘기차 절친들’
  • 유동현
  • 승인 2019.01.07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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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차 통학생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의 발자국을 남긴 모교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경인선이 개통(1899년) 된 후 인천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5년부터다. 당시 인천의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선 매년 4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중등학교가 몇 개 되지 않아 상급학교 진학을 원하는 학생 중 상당수는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요즘 같이 하숙이나 자취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통학을 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이 땅에 처음으로 ‘기차통학’이란 새로운 풍속도가 생겼다.
광복 후의 기차통학은 부천이나 부평 지역 학생들이 거꾸로 인천 시내에 있는 학교로 진학하면서 생겼다.

 

1964년도 인천고 앨범. 동인천역에서 254열차 기관사와 함께.

1968년도 제물포고 앨범. 역무원과 그들의 ‘애마’와 함께 찰칵(동인천역)

 
60년대 고교 앨범에는 기차통학생들만 따로 모아서 촬영한 사진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일부 학교는 ‘기차통학생 클럽’이란 타이틀 까지 붙여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그들의 우정은 끈끈했다. 버스가 흔치 않았던 시절 3년 동안 함께 기차를 타고 통학했으니 반 친구보다도 더 정이 들었다.
30분 혹은 한 시간 간격으로 다닌 기차 때문에 그들은 거의 매일 같은 열차를 탔을 것이다. 기차 운행 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이라 툭하면 연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억울하게 ‘단골 지각생’으로 찍히기도 했다.
 


1959 박문여고 앨범. 제물포역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증기기관차 배경으로 한 컷.

1960년도 인천여상 앨범. 사진을 증기기관차 모양으로 오려 앨범에 수록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던 그들은 ‘영역’ 다툼도 서슴치 않았다. 학교마다 전용칸을 정해 독차지하기 일쑤였다. 가끔 칸을 침범하면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는 달라도 같은 지역에 사는 선후배 사이였기 때문에 싸움은 선배 선에서 금방 정리되었다. 오히려 졸업 때쯤 되면 다른 학교에 다닐지라도 같은 지역 학생들끼리는 3년 간 열차 안에서 친해지기 마련이었다. 이로 인해 시내 학교의 온갖 소문은 열차 안에서 부풀어지기도 했다.
 


1968년도 송도고 앨범. 만원 기차의 출입문은 ‘창문’이었음 은근히 시연.

 1969년도 동인천고 앨범. 제물포역 바로 옆에 초가집이 보인다.


역장이나 역무원 혹은 기관사들도 함께 포즈를 취한 사진도 적지 않다. 그들은 3년 내내 보았기 때문에 서로 진한 석별의 정을 나눴다. 간혹 일부 중학생은 동일계 고교를 진학해 6년 동안 기차통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코흘리개 꼬마가 레일 위에서 콧수염 거뭇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대부분 경인선 통학생이었는데 수원, 군자, 소래 방면의 수인선 통학생들도 있었다.

 

1967년도 인천고 앨범. 수인역에서 수인선 ‘꼬마 기관차’를 배경으로 한 컷.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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