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단 등대와 분바위가 부르는,서해 멀리 외로운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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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단 등대와 분바위가 부르는,서해 멀리 외로운 섬
  • 류재형
  • 승인 2019.01.17 0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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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청도는... - 글·사진 사진가 류재형



소청도 등대 2층 전망대에서 서남쪽으로 본 풍광.
붉은 해가 잠들면 짙은 노을이 어둠을 감싸고 형용할 수 없는 그라데이션의 하늘빛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서해안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등대로 소청도의 서쪽 끝 해안절벽 위 83m 지점에 자리한다. 일제 강점기에 고래잡이를 위해 세웠다. 이 위치는 인천항 산동과 대련 등지를 오가는 선박들이 지나가는 항로로 인근 북쪽의 대청도와 백령도, 그리고 바다 건너 북한의 옹진반도(장산곶)가 훤히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소청도 등대의 등명기는 1908년산으로 대한민국에서 현역으로 사용되는 등대 등명기 중 팔미도 등대 다음으로 가장 오래 되었고 2006년에 새롭게 건립되었다. 등대 아래로는 가마우지 서식지가 있다. 이 등대는 인천항에서 중국 쪽을 오가는 서해 국제항로 상에서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을 오갔던 뱃길도 이 인근을 지나갔으며, 풍랑을 만나면 중국 어선들이 피항하는 곳이기도 했다. 소청도에 TV가 가장 먼저 보급된 곳이 이 등대의 관사라고 한다. 소청도 주민이 유일하게 소풍가는 주요 관광지이기도 했다. 뱃터에서 15분 거리인데, 이곳을 오르는 지형이 가파르고 위험하기도 하다.


 

차를 주차하고 200여m를 올라 입구에서 본 등대, 흰색의 사각 구조물에 바닷바람을 깊게 쏘인 등대는 독특한 아우라를 가진 이국적 풍광이다.
 

 
인천168개의 섬들은 나름대로 이야기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지내며 소청도는 특별한 슬픈 역사와 질곡의 세월을 보낸 섬이다. 한반도 화해무드에 맞추어 [인천in]은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소청도의 역사와 삶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격주 연재한다.

일제 강점기 소청도에는 동양대리석이라는 일본의 회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소청도 남쪽 예동 해변에 배를 대기 위한 석조 구조물을 세워 놓았다. 해변의 서쪽에서 동쪽 바닷가 구조물까지 레일을 깔고 대리석을 배에 실어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함이다. 이 돌이 바로 스트로마톨라이트라 불리우는 질 좋은 대리석이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캐었고 60년까지 운영하였다. 1946년에는 기뢰 폭발사고로 주민 67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고, 6.25 이후 유엔사 관할 시절에는 잦은 어업 통제로 삶의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평소에 잔잔하던 파도가 갑자기 높아지고 가끔은 돌풍을 만나 돛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다반사였다. 6.25 이후 51-52년도에만 8척의 배에 20여명 등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50명이 넘는다. 자의든 타의든 소청도 사람들은 전쟁의 끝자락에서 다른 지역보다 더 거칠게 수많은 고통과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있었다.

[평화의 바다, 소청도를 보듬다]의 의미는 문화예술 접목을 통해 주민과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보듬고 풀어주어 화해와 상생의 평화 메시지를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는 2018년 9월에서 4개월간 진행되었고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역협력형 사업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섬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도시에 나간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자식들의 소망은 부모들이 섬에서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더 이상 섬이 섬으로서의 고립이나, 불편하기보다는 정신세계와 정주의 여건(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섬의 역사를 기록, 보존하고 화해와 상생이라는 목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움직인다.



 
1. 소청도의 현재를 보다
 
소청도 면적은 2.91㎢이다. 철새도래지로 조류학자와 지리 연구자들이 섬을 많이 드나들며 국가철새연구센터가 건립되었으나 약간의 문제로 아직 오픈하지 못하고 있다. 소청도와 대청도, 그리고 백령도를 아우러 국가지질공원을 추진하고 있고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아름다운 섬이다.
 
소청도는 섬이 작아서 예로부터 소수의 주민이 거주하여 왔고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돕고 살아왔다. 섬은 예동, 노화동으로 나뉜다. 너무도 외로웠던 섬 주민들은 지나던 상선이나 표류해온 선박들이 정박하게 되면 깍듯이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며 친절을 베풀어 예의를 지켰다하여 예동(禮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노화(蘆花)동은 지역이 가파른데다가 삼면이 깎아지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인데다 예부터 갈대가 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다고 해서 불러지고 있다(옹진군 지명유래 참고).

소청도 주민 수는,
최고 정점인 1960년도 말에 1,300여명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와 정전협정 이후 작전 중인 켈로부대. 해병대 등 국군이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며 그 현장에 지금은 일반 주택들이 자리하고 있다.
1,300명이나 모여 살았던 사람들은 향학열에 불타 자녀를 육지 학교로 유학을 보냈고 일자리(직장)을 마련하기 위해 육지로 나서면서 노령화되어 현재는 주민과 공공기관 직원 등 250여명(그 중 노화동은 40여명)이 살고 있다.
1973년 소청도가 백령면 관할 리 단위로 소재할 때 인구는 982명으로 “백령도지”에 기록되어 있다. 2004년 인천광역시에서 주관한 인천앞바다바로알기 탐사팀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는 108가구에 207명(영외군인 제외, 순수 토박이)이고, 2010년에는 116가구에 222명이었다.
현재는 소청도 남쪽으로 소청1리(예동)와 2리(노화동)로 나뉘어져 삶의 터전을 지켜오고 있는 원주민 수는 대략 250명 정도 된다. 2018년 12월 현재는 소청1리(예동) 이장 이은철, 소청2리(노화동) 2리 이장 조성청, 어촌계장 이용희가 맡고 있다.
 

 
분바위 앞에 물 때가 맞아 바다가 열리면 수많은 홍합과 다시마, 톳이어우러져 생명의 보고가 들어난다.
 
 
주 어업은,
주 어종인 홍어 잡이와 까나리, 조기가 주 어업이었으나 1990년대 들어서 조기는 자취를 감추었고 홍어와 까나리는 대청도, 백령도에서 명맥을 유지하여 잡고 있다.
홍어 잡이는 일제 강점기 부터 시작했고 6.25이후 서해 5도가 유엔사령부 관할에 있었다. 70년대 초반 수원22호 납북사건으로 조업이 통제되자 모든 어선이 선단을 구성하여 충남 태안반도, 전남의 흑산도 방면으로 옮겨 조업을 이어갔다.
이런 상태는 몇 년 가지 못했고 서해5도의 조업 재개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자 충남, 전남 지역으로 옮겨갔던 선단들이 속속 소청도로 올라왔다. 그러나 군부대의 엄격한 조업 통제로 출어의 어려움 속에 80년대 초까지 취로사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지금까지도 소청도 주민들은 고갈된 어족자원이긴 하지만 다른 섬에 비해 월등히 나은 어업과 노인들의 공공근로사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소청도에는 두떼기의 논(100여평)과 척박한 밭(18헥타) 재배(보리, 고구마, 조, 메밀)만이 있었으며 주소득원은 오로지 바다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현재는 낚시 배와 인근어장에서 우럭, 놀래미, 삼식이, 삼치, 꽃게 등을 잡고, 미역, 다시마, 홍합, 가리비 등을 채취한다.

 

민박집에 널어놓은 삼식이와 부속 고기들, 해마다 11월이면 마을주민들이 스티로폴 배를 타고 인근 해변에 나가 창으로 찍어 삼식이를 잡는다.


예동에 고기를 널어 말리는 도구에 걸려 있는 홍어잡이 낚시바늘. 지금은 유일하게 대청도에서만 잡지만 한 때 1970년 초까지 소청도에서 왕성하게 홍어를 잡았었다. 그 흔적이 이 낚시바늘로 남아있다.
 
 
종교는,
50년대 개인집(당시 소청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시작한 장로교가 소청교회의 전신이며 현재까지 3명의 장로를 배출했고 현재 담임목사와 30여명의 신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천주교는 노화동과 예동에 각각 공소가 세워졌으나 노화동 공소는 80년대 초 문을 닫았고 현재는 철거되었으며 예동 공소는 현 위치에 2000년대 초반 개축됐다. 현재 20여명의 신자들이 대청도에서 들어오는 신부와 미사를 드리고 있다.


 
예동의 언덕에 있는 김대건신부 동상, 그의 순교 역사가 쓰여있다.


작은삭금 선착장 앞에 있는 월띠 부근, 스트로마톨라이트를 캐내어 실어나르던 곳, 1970년대 초에 이 돌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더 이상을 캐어내지 못했다.
 

분바위, 이 곳에서 서해의 많은 섬들 중에 으뜸의 경관을 가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을 보려면 특히 아침 일찍이나 저녁 무렵 물이 많이 빠져있는 시간에 가서 바위 전체를 보는 느낌은 최고로 힐링하는 포인트이다.
 

소청도의 분바위는,
여성이 분칠을 한 것처럼 바위가 희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소청도 분바위는 천연기념물 제 508호로 지정되었으며 생물의 광합성 활동으로 만들어진 생물학적 석회성분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화석이 ‘스트로마톨라이트’라 불리운다.
소청도의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선캄브리아기 지층으로 약 10억 년 전에 활동한 남조류이다.
월띠(밤이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고 어부들이 이 바위의 흰 반사를 보고 들어왔다고 해서 월띠라고 불렀다), 어르꾸미, 이랑금(산에서 내려온 줄기가 밭의 이랑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등으로 불리웠고 천혜의 자원인 홍합, 미역, 강투(톳)이 집단 서식하는 곳으로 마을 어촌계의 어장이다. 당연히 아무나 홍합을 채취하지 못하며 겨울철에 물 때 맞추어 바다가 열리면 공동작업을 통해 한 달에 두 번 홍합을 캔다.
1960년대에 이 곳 분바위 부근의 작은삭금 선착장(소청도 동쪽 끝)에서 대리석을 싣고 가다 황해도 비읍도 근방에서 돌풍을 만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 당시 위급환자가 생기면 부영발 신부가 만든 백령도의 병원으로 가야했으며 부영발 신부의 병원선 '바다의 별'이 운영되면서 밀가루와 옷가지 등을 많이 원조 받았다.
 
소청도를 운항하는 배의 역사는,
가장 초기에 운행했던 배는 백령호라는 목선이었고 인천항에서 무려 14-15시간이 걸렸다. 다음으로 은하호(철선), 새관광호, 황진호(철선) 13시간, 옹진호(철선) 10-11시간, 새경기호(철선) 9-10시간, 그리고 쾌속선 시대가 도래해 4-5시간으로 단축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원래의 뱃터는 예동 마을 앞 남쪽이었으나 바람을 막아주는 장치가 없었고 초기에는 접안이 안 되었으므로 작은 나룻배(종선배)로 노를 저어 왕복하면서 사람과 화물을 날랐다.
60년 까지는 소청도에서 백령도까지도 어선을 타고 3-4시간 걸려 다녔다.
잔잔하기만 하던 파도가 갑자기 높아지곤 했고 가끔은 돌풍을 만나고 돛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다반사였다.
현재 인천 나가는 배는, 백령도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쾌속선(옹진훼미리호)이 인천에 도착하고 오후 1시에 다시 백령도로 출발한다. 소청도까지는 대략 편도 4시간이 소요된다.
인천 연안부두에서는 오전7시50분 2천 톤급의 하모니플라워호와 8시30분에 출발하는 코리아킹호가 있으며, 이들 여객선은 백령도에서 12시50분(하모니호), 1시30분(코리아킹)에 인천으로 출발하며 소청도 까지는 3시간 10분 내외 소요되는 쾌속선들이다. 소청도에서는 여객선이 입항하기 30분 전에 방송을 통해 안내해 준다.
 
하지만 아직도 소청도에 차량의 입도가 불편한 실정이다.
차량은 하모니플라워호를 타야만 승하선 할 수 있지만 소청도에는 이 쾌속선의 접안시설이 없어서 불가능하고, 대청도와 백령도만 승하선 할 수 있다. 당연히 화물선을 이용해야 하나 이마저도 격일제로 운행하고 미리 차량을 예약하고 인천항 화물부두에서 화물선에 차량을 승선할 때도 항운노조의 힘을 빌어 비용을 주고 승선시켜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차주는 여객선으로 소청도에서 들어와 하선을 위해 기다려야 한다. 비용도 1톤 트럭이나 봉고차의 경우 왕복비용이 8-90만원에 달한다.
 
숙박시설은,
제법 규모가 있는 팬션이 4-5군데 있고 여인숙도 5-6개 되지만 식당이라고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는 집은 없고 민박집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 식사는 소청도의 바다 먹거리가 풍부해 다른 섬보다 훌륭하며 마트나 편의점은 없고 간판도 없는 가게 1곳이 유일할 뿐이다. 숙박비 기본 2인 5만원, 1식 7000원으로 모든 집이 동일하다.
 

예동 마을 전경, 이 마을에는 청색의 지붕이 많고, 노화동은 주황색의 지붕이 많아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예동에만 100가구 200명 정도의 주민이 산다.
 

노화동 마을 전경, 유일하게 스레트 지붕에 페인트를 칠한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독특한 풍광을 만난다.
 
 
인천광역시가 서해5도에 지원해주고 있는 여객운임 할인정책이 2018년까지 80%에 달해 많은 사람들이 섬을 찾고 있고 대청도나 백령도는 벌써 단체 패키지 여행상품이 사람들을 엄청나게 불러 모아 인심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소청도는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인심에 먹거리가 풍부한 자연이 잘 보존되어있는 섬이다. 차후 행정이나 육지의 많은 관심이 필요한 섬이다. 하지만 이제는 소청도에 국립지질공원 지정이 코 앞에 있고, 많은 개발자금이 투입된다는 계획이 서 있는 만큼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섬마다의 특화를 위해서라도 이 섬이 자연보존과 상생의 합리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청도에 사는 주민의 단합된 의지가 필요한 시기이다. 소청도는 인천광역시의 섬 중 마지막 남은 천연의 섬, 낙원인 것이다. 시급한 것은 소청도 주민의 [정주여건 개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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