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목욕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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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목욕탕 풍경
  • 은옥주
  • 승인 2019.01.30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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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 은옥주 / 공감심리상담연구소 소장
 
 
 
김이 뽀얗게 서려 안개가 낀 듯 몽롱한 시야에 모락모락 김을 내뿜는 듯 풍성한 몸 들이 움직이고 있다. 방금 싸늘한 공기와 매서운 바람을 뚫고 달려온 내 몸도 코끝부터 발끝까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우선 따뜻한 물을 풍덩 떠올려 쏴아쏴아 온몸에 퍼부어 본다. 몸의 세포가 간질간질 살아나는 듯하다. 퐁퐁 솟구치는 물 샤워를 등에 대고 앉아 온몸으로 탕속의 따뜻한 물을 느끼는 것이 참 행복하다. 온탕 속에서 마주한 낯선 얼굴이 익숙하게 말을 걸어온다.
 
“날이 추우니께 뜨끈뜨끈한게 참 좋지유?”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러게요. 다른 동네는 다 없어졌다는데 이 목욕탕 참 고맙네요”
 
옆자리에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와 갓 노년에 접어든 젊은 할머니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자세히 보니 얼굴과 몸매, 걸음걸이까지도 엄마와 딸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엄마 할머니는 몸이 많이 불편하신 듯 일어서기도 앉기도 거북해 보였다. 딸은 엄마의 몸을 구석구석 부드럽게 문지른 뒤 엎드린 채 정성스럽게 발가락 사이사이를 닦아주고 있었다. 늙고 병든 엄마가 애처롭고 안쓰러운 듯 사랑과 정성을 다 하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왔다.
 
내가 이사 온 후부터 이 동네 목욕탕을 다녔으니 30년가량 단골인 셈이다. 그 이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 테니 역사가 꽤 오래 되었을 것 같다. 사춘기의 딸을 데려가 등을 밀어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얼마 전 딸이 낳은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을 다녀갔다. 집에서 혼자 목욕하던 아이는 공동 목욕탕이 신기한 듯 했다. 옷장 열쇠를 받아 발목에 끼는 것을 보더니 자기도 얼른 열쇠를 발목에 건다. 조그만 발목에 헐렁하자 열쇠 끈을 올리다 올리다 허벅지 위쪽까지 올려끼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아줌마, 누나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목욕하는 모습이 신기한 듯 연신 두리번거리며 커다른 통에 물 받아 들어가 앉아 재미있게 놀았다. 목욕이 다 끝나고 옷갈아 입는 아이에게 할머니가 한마디, 아주머니가 한마디 정답게 말을 걸고, 볼이 빨개진 따끈따끈한 아이는 누군가 건네준 요구르트를 쪽쪽 빨며 행복한 표정이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던 아주머니 한 분이 껄껄 웃으며 이바구 한 자락을 털어 놓았다. 몇 일전 너무 바빠서 허둥거리며 은행 일을 보고 시장도 가고 하루종일 뛰어다니다가 문득 자기 발을 보니 한쪽 발에는 부츠가, 다른 한 쪽 발에는 운동화가 신겨 있더란다. 부츠는 꽤 굽이 높아서 기우뚱 했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뛰어다녔던 자기 모습이 너무 창피했었단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다 돋는다면서 웃었다.
 
“아나, 그리고 다니는데 왜 아무도 말을 안해 주는겨.” 그녀는 뭇 사람들을 향해 음성을 높였다. 옆에서 듣던 또 다른 아주머니들도 자신들의 실수담을 연신 털어 놓았다. 모든 이야기가 하나같이 엉뚱하고 재미있어서 모두 벌거벗고 둘러서서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한쪽 구석에는 옹기종기 모여앉아 TV 연속극을 보는 무리가 있었다.
“저놈이 아주 나쁜 놈이여.”
“저 놈이 지 마누라 알기를 뭣같이 알고.. 에이 나쁜 놈”
핏대를 세우며 노기등등한 아주머니들의 손가락질에 주인공 남자가 마구 욕을 당하고 있었다.
 
옛날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는 어느 집 잔치이던, 초상이던, 명절이던, 이웃이 같이 모여 지짐이 붙이고 떡하고 국수 말며 서로 어울려 주거니 받거니 살았었다. 삭막한 도시, 사람들이 어울릴 광장이 없어진지 오래다. 마을 사람들끼리 어울려 놀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은데 우리 동네는 목욕탕 때문에 복 많은 동네인 것 같다.
 
개인심리학의 아버지 아들러는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는 공동체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느끼고 존재 이유를 느끼며 행복감을 얻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마음이 쓸쓸해지거나 머리가 복잡해질 때 나는 보따리를 챙겨 동네 목욕탕으로 간다. 뽀얗게 김서린 욕탕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남을 발견하며 마음에 쌓인 묵은 때를 깨끗이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훈훈하게 덥히고 목욕탕을 나서는 발걸음이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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