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서 ‘모두’로 주어를 바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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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서 ‘모두’로 주어를 바꾸는 것
  • 최원영
  • 승인 2019.02.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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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아름다운 배려



 
풍경 #103. “정치가로서 성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달라이 라마는 말했습니다.
“모두가 행복을 바라지만 고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고 지극히 단순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준엄한 꾸중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주어인 ‘모두가’ 라는 낱말에 그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와 같은 말을 쉽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주어가 ‘모두’에서 ‘나’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 또는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의 행복을 파괴하고 고통을 주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달라이 라마가 회초리를 들었던 겁니다. ‘나’에서 우리 ‘모두’로 주어를 바꾸어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나’도 ‘너’도 행복해지고, ‘나’도 ‘너’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사소한 일상에서 ‘너’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여유가 해답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일본 고전 연극의 대부인 모리타 간야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가 공연장에서 지친 나그네의 역을 맡아 공연할 때였다고 합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자신을 방문한 그의 제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짚신 끈이 풀려있는데요.”
모리타 간야는 고맙다고 하면서 짚신 끈을 단단히 맸습니다. 그러고는 제자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더니 다시 끈을 느슨하게 풀어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기자가 공연 후에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끈을 묶고 또 다시 풀었어요?”
“사실 나는 오랜 여정 끝에 탈진한 나그네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끈을 풀어놓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제자가 조언을 해주었으니 끈을 단단히 묶었지요.”
“제자가 말했을 때 설명하시면 되었을 텐데요. 그게 제자에게도 배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리타 간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나에 대한 제자의 진심어린 관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요. 그러고 나서 가르쳐도 늦지 않을 겁니다. 연기의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는 많을 테니까요.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의 호의에 대해 내가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좋은 스승입니다. 제자가 당황할까봐 제자를 배려하는 스승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스승의 제자에 대한 배려가 아름답습니다. 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뭉클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이렇게 지극히 사소한 일상에서 상대를 배려하는데서 시작됩니다.
 
1949년 독일은 연합군 점령의 시대를 마치고 하나의 국가로 출발하게 됩니다.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는 서독의 민주정치가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았고, 특히 패전의 절망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정치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훗날 어느 기자가 아데나워 수상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수상님, 정치인으로 성공하셨는데,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가 말합니다.
“간단해요. 상대가 너무 영리하면 자신이 멍청해서는 안 되고, 상대가 멍청하면 자신이 너무 영리해서는 안 되지요.”
 
맞습니다.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상대에게 맞출 수 있는 너그러움, 상대를 헤아려주는 배려, 이것이 ‘너’와 ‘나’를 하나로 묶어 아름다운 화음을 내게 하는 비밀이고, 이것이 ‘너’와 ‘나’ 모두를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열쇠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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