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도화선 2.8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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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도화선 2.8독립선언
  • 최문영
  • 승인 2019.02.11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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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칼럼] 최문영 / 인천YMCA사무처장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재일본한국YMCA회관>


지난 8일 오전 일본의 수도 도쿄에 위치한 재일본한국YMCA회관 강당에서는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같은 날 오후에 열린 한일 시민단체 간담회에는 한국에서 YMCA, YWCA, 경실련, 시민단체연대회의 등이 참석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한반도의 평화 촉구와 일본의 평화헌법 수호’가 동북아 평화를 위해 중대한 의미를 지니며, 시민들의 힘만이 평화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함께했다.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문이 울려 퍼졌던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관(현재의 재일본한국YMCA회관)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전소됐고 그 장소로부터 6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지금의 YMCA 회관이 서 있다. 재일본 한국YMCA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이번 행사에서는 회관 건물 10층 협소한 곳에 자리했던 2·8독립선언기념관을 2층으로 확장 이전하는 기념식도 함께 열렸다.
 
100년 전 일본의 수도 도쿄는 동양 최대의 도시였다. 당시 조선 청년들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도쿄로 향했다. 조선 유학생들은 대부분 부유층 자제로 일제의 지배계급에 편입되려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일제의 실상을 파악하여 독립의 길을 모색하려는 청년들도 있었다.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던 유학생들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현 재일본한국YMCA), 대한흥학회 등의 단체를 꾸려 친목을 다지며 조국의 독립을 함께 도모했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약소국에 희망을 주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지만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지위에 있던 일본에 의해 강점된 조선은 사실상 그 대상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1919년 1월 6일 200여명의 유학생들은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최근우 김상덕 서춘 이광수 김철수 등 11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고 다음날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게 된다. 2·8독립선언이 가시화되는 순간이었고,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초안을 작성하여 11명의 실행위원들이 이에 서명했다.
 
2월 8일 눈발이 날리는 날 조선청년독립단은 오전에 독립선언서 결의문을 각국 대사와 조선총독부, 일본 국회의원과 신문사 등에 우송했고, 오후 2시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 유학생 600여명이 결집한 가운데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총회를 개최한다.
 
회장 백남규가 개최선언을 하자 최팔용이 준비한대로 긴급동의를 발의하여 총회를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변경, 조선독립청년단을 발족하자고 제안한다. 곧이어 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며 2·8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김도연은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어서 가두시위행진을 진행하려 했지만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고 유학생 27명이 체포된다. 하지만 2·8독립선언 주도자들이 체포된 후에도 최승만 등 유학생들은 2월 12일과 28일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며 거리행진을 벌였다.
 
체포된 유학생들은 금고형을 선고받고 1년 남짓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초를 당해야 했다. 특히 송계백은 약관의 나이에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위대한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심장 도쿄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중국의 5·4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식민지 청년들이 침략한 나라의 수도에서 독립선언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조선의 청년들은 목숨을 내놓고 이 일을 감행했던 것이다.
 
2·8독립선언은
첫 번째, 본단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우리 민족의 생족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한다.
두 번째,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판결할 기회를 요구한다.
세 번째, 본단은 만국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한다.
네 번째, 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될 때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선언한다. 이것으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 2·8독립선언 100주년이 됐다. 다음 달 초하루면 3·1운동 100주년이 된다. 그 기념식이 전국적으로 준비되고 있다. 3·1운동에 앞서 일본 땅 한복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청년들의 함성이 민족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00년 전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던 그 장소가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 언론사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우뚝 서서 기념식을 갖게 된 것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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