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경영의 1인자, 유일한 선생은 투철한 독립운동가였다
상태바
윤리경영의 1인자, 유일한 선생은 투철한 독립운동가였다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9.03.01 05: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해방 후 유한양행 정비...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





유일한 선생은  유한양행과 학교재단 유한재단을 설립했다. 기업을 운영하며 얻은 수익을 인재 양성 및 교육 사업에 투자했고,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유일한(1895. 1. 15~1971. 3. 11) 선생은 1894년 12월 13일 유기연과 김씨 사이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 유기연은 장사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평양 시내에서 농산물 도매상과 재봉틀 대리점을 경영하여 재력을 쌓은 상인이었다. 일찍이 그는 숭실학교를 설립했던 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에게 세례를 받았고, 단발을 몸소 단행한 개화인사이기도 하였다.
 

당시 선생의 부친은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벌이던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전투구와 러일전쟁을 목격하면서 국망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국권을 수호하고 자주 독립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 양성과 경제적 자립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진 자본주의 대국인 미국에 아들을 유학시키기로 결심하고, 외부 참서관을 지낸 박장현과 그의 조카인 박용만의 미국행에 선생을 딸려보냈다. 1905년 2월 일행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선생은 곧 네브래스카주의 커니에 정착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해 11월 일제는 온갖 협박과 위협으로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우리 나라의 국권을 강탈하더니, 1907년 7월에는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우리 나라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민족방위의 핵심 동력인 군사력을 말살하였다. 이같이 국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국내에서는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지향하는 구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즉각적인 반일 무장투쟁으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국민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재미동포들 또한 이 시기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등 한인 자치단체들을 확대 개편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특히 국내에서 활빈당에 가담하여 반일 무장투쟁의 경험을 갖고 있던 박용만은 장래의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미주지역에서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1908년 7월 개최된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 대표자회의’에서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하여 일부의 반대를 누르고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1909년 6월 그의 주도로 한인소년병학교가 네브래스카주 헤스팅스에서 설립되었다. 이렇게 미주지역에서 최초의 한인군사학교가 개교하자, 박용만을 따라 도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독립전쟁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선생은 이 학교에 나가 학비를 벌고 오후에는 학과공부와 군사훈련에 임하였다. 독립전쟁의 지휘관이 되겠다는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선생은 남보다 부지런하고 열심일 수 있었다.
 
선생의 소년병학교 생활은 이 학교가 문을 닫는 1912년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길지 않은 3년여의 기간이었지만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열렬한 독립전쟁론자인 박용만을 지도자로 모시고, 조국 독립에 헌신하려고 하는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받았던 이 학교에서의 민족 군사교육은 선생에게 조국과 민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형성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사상이야말로 선생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원천이었고, 기업 경영의 지표로 작용하였다.
 
이후 선생은 1915년 헤스팅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트로이트 변전소에 취업하여 학비를 마련한 다음 1916년 미시간 주립대학 상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면서 선생은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무역업을 하던 중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거족적인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동포들은 1919년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대표회의’를 개최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을 지지 후원하며, 세계 만방에 한국 독립의 의지를 선전 전파하기 위한 대규모의 독립선언대회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미 동부 필라델피아의 리틀 극장에서 150여 명의 재미 한인대표들은 미 상원의원과 시장 등 다수의 미국인 후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대학 4년생이었던 선생은 대의원 자격으로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등과 함께 이 대회에 참가하여 실무적인 일을 맡았다. 이 대회에 참석한 한인대표들은 한국의 독립 승인을 촉구하면서 4월 13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을 미국 국민에게 알리는 ‘한국 국민이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 등을 작성 반포하였다. 이 대회의 마지막 행사로 참석자 모두는 대형 태극기를 든 선생을 필두로 필라델피아 시내를 시위 행진한 뒤 미 독립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여 한국인의 독립열망을 다시 한 번 표출하였다. 이 대회 기간 중 선생은 헨리 김, 조안 우 등과 함께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 기초 작성위원으로 선출되어 결의문을 성안 낭동하였다.
 
결의문의 내용을 통해 선생을 비롯한 당시 미주 한인대표들이 상정한 독립국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우선 이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대통령 중심제를 모델로 하면서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가미한 국가체제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는 대통령 1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제도적으로 방지함은 물론 새로 건설될 독립정부에 각지 독립운동자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특히 이들은 민중 주도의 민주주의를 제창하면서, 민중 교육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는 선생을 비롯한 재미 한인동포들이 미국 민주주의를 실제로 경험하면서 그 토대로서 민중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던 탓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민족 실력양성을 위해서도 민중 교육을 매우 시급한 과제로 인식한 까닭이었다. 따라서 향후 선생이 고국에서 기업 경영과 더불어 교육사업에 온갖 정열을 쏟았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1926년 유한양행 설립하여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하였으며, 이후 선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와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사 등에 취직하였다가, 1922년 대학 동창과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를 운영하여 어느 정도의 사업자금이 마련되자 선생은 곧 귀국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선생은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1926년 12월 유한양행을 설립,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선생은 1928년 '한국에서의 소년시절'이라는 영문책자를 간행하여 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유한양행의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진력하고,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하였다.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대한인국민회에 기부한 자금에 대한 영수증(1925.5.27) 영수액은 6달러이며 기부금으로 여겨지는 액수가 18달러로 기록되어 있다.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일제에 의해 만주침략(1931. 9)과 중일전쟁(1937. 7)이 도발되어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변화하여 갔다. 이에 따라 선생은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수출선의 다변화를 위해 유럽 및 중국 시장개척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1년 4월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여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 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지와 후원 아래 항일 독립전선에 모든 역량을 집결하여 광복대업을 촉성하기 위한 대일 민족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해외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은 대한민족은 주의와 이론을 초월하고 온갖 역량을 항일전선에 집중할 것. 대한민족과 각 단체는 임시정부를 절대 신뢰하며 물질과 정신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봉대할 것. 해외 한족단체는 전체 동포에게 광복군군인의 의무가 있을 것을 인식시키며 전선 출동의 훈련을 장려하기로 할 것 등을 결의하고, 그 통일조직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이때 선생은 이 위원회의 집행부 위원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자금 조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인 국방 경위대로 창설된 맹호군 편성에 참여하였으며,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미군 전략정보처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년병학교 출신으로 대일 무장투쟁과 독립군 양성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선생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한인 국방 경위대로서 창설된 맹호군 편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같은 해 8월 29일 LA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장 김호와 함께 참석하여 중경임시정부의 축사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이는 비록 주정부에서나마 재미 한인동포들이 일본 국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민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감격의 순간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결실이 있기까지는 선생의 보이지 않는 활동이 밑받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선생이 콜로라도에 있는 M.O. Jung에게 보낸 편지(1943.9.4)에는 세계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조국의 독립이 요원함을 한탄하고, 재정적 지원을 해준 데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선생의 조국 광복에 대한 투철한 의지는 1945년 냅코작전계획의 참여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군 전략정보처에 의해 수립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을 선발하여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다음,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이었다. 이 같은 작전계획은 미주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을 이용하여 동시에 계획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1월 선생은 이 작전계획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되어 입대 훈련을 받고, 제1조 조장으로 임명되어 작전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실행되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 선생은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아울러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 등을 설립 운영하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자본의 사회 환원에도 힘썼다. 특히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하면서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계함으로써 전문경영인 시대의 서막을 열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했던 사실과 더불어 기업경영사의 미덕으로 남을 것이다. 선생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일한 선생 기념관은 부천 유한대학교 내에 소재하고 있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