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상태바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 심형진
  • 승인 2019.03.05 0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2) 순천 선암사
<선암사 승선교와 강선루>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 선암사
 
북미 회담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난 다음날 찾은 순천 선암사, 천연기념물인 600년 묵은 선암사 홍매는 아직 봄이 일러 피지 않았다. 아기 주먹 같은 꽃망울만이 따사로운 햇살과 언제 피어야 할지를 놓고 소리 없이 다투고 있을 뿐이었다. 이파리 하나하나에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의 서원을 담아 피어있는 팔손이도 꽃술을 내밀고 아직 피지 않았다. 단지 며칠의 차이일 뿐이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이니, 누구를 탓하랴!



<심검당 부엌 출입문>


선암사 심검당 부엌 출입문 위 벽에는 연기가 빠져 나가는 통기창이 있다. 불을 다루는 곳이어서 그런지 물 수(水)자와 바다 해(海)자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그 옆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괘와 물을 상징하는 수(水)괘의 형상도 새겨 놓았다. 이를 여기에 새긴 이의 뜻은 어떨지 모르지만 상상은 자유, 보는 이 마음대로 해석해 본다.
물이 위로 올라가고 하늘이 밑으로 자리 잡으면 주역의 수천 수(需)괘가 된다. 주역에서 이 괘는 기다림을 뜻한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뜻이다. 발묘조장이라는 말처럼 모를 뽑아 억지로 키를 키우면 그 모는 말라죽을 뿐이다. 부엌에서 하는 밥도 다 때가 되어야 익고 찾고자 했던 맛이 나온다.
하늘이 위로 올라가고 물이 밑으로 내려오면 천수 송(訟)괘가 된다. 다툴 송자이니 다툼이 있다. 다툼은 자기가 잘났고, 옳다고 믿어야 하는 일.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투다보면 막히고,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려우니, 막히고 두렵다고 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중재를 할 대인이니 대인을 만나면 길하다고 했다.



<심검당>


심검당은 마음-번뇌-윤회를 단칼에 자를 칼을 찾는 집이다. 스님들은 평생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끊고, 윤회의 사슬을 끊고자 한다. 자신이 이룬 성취는 자신의 마음과 싸워 얻은 성과이다. 이것이 옳을지 그를지 본인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선지식이요, 스승이다. 때를 기다리며 수행을 하되, 수행을 올바로 인도해 줄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한 곳이 바로 심검당이다. 심검당 벽에 새긴 뜻을 북미 모두 생각해 볼 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암사는 태고종 총 본산이자, 조계종 20교구 본사이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두 종단이 모두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다툼이 있는 절이다. 최근 법원의 판결은 태고종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대법원 판결까지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다. 서로의 다툼이 있어 이 사찰의 재산권을 순천시가 행사하였다. 남북한이 다퉈 비무장지대의 자연이 잘 보전되었듯이 이곳 선암사도 최소의 유지보수만 행하였기에, 고즈넉한 절의 분위기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비밀의 정원을 거니는 것 같다는 일행의 평처럼 전각 사이사이의 공간이 아기자기하여 사찰이 주는 엄숙함보다는 푸근하고 정겨운 느낌이 든다.



<선암사 해우소>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 해우소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구처럼 눈물이 나는 마음을 안고 선암사 해우소로 간다. 똥과 오줌이 마려운데 화장실을 찾지 못하면 얼마나 근심이 큰가? 지금 한반도의 형국이 바로 그와 같다. 몇 십 년간 쌓여온 분단의 아픔이, 분단의 슬픔이 똥이 되고 오줌이 되어 쌓이고 쌓였는데, 이제 겨우 해우소를 찾은 느낌이다. 똥을 참아 본 사람은 안다. 화장실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다급한지를. 그곳까지 멀쩡히 걸어온 몸도 그 문 앞에서는 더 다급해지고 견디기 어려운지를. 선암사 해우소에는 ‘뒤ㅅ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좌에서 우로 쓰인 현판을 우에서 좌로 읽으면 ‘깐뒤’처럼 읽힌다. 심검당 새겨진 괘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듯 이 글씨도 앞뒤로 읽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분단의 뒤처리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 과정도 중요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3·1독립만세 100주년답게 젊은 아가씨 둘이 100년 전 한반도 전역에서 떨쳐 일어난 그날처럼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손에 들고 절을 찾았다. 그 날 이후 26년이 지나서야 독립은 찾아 왔다. 어디 한 술에 배부르랴! 심검당 수천 수괘와 해우소 뒤ㅅ간에 담긴 뜻을 새기며, 분단을 자를 그 칼을 기다린다.
지금쯤 선암사 홍매는 봄을 뽐내며 조계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으려나.
 
2019년 3월1일 선암사를 다녀오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