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가 있으면 오래 나와 있지 못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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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가 있으면 오래 나와 있지 못하지"
  • 김인자
  • 승인 2019.03.2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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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전철 역사로 모이시는 할머니들

"노인네들은 냄새만 안 나믄 돼."
"나는 망에다 넣어서 돌려."
"뭘 구찮게 망에다 넣어. 우리가 벗어놔 봤자 몇 개 되지도 않는데. 다 잡아넣고 한꺼번에 돌리믄 되지."

전철역사 안에 있는 작은 휴게소.
할머니들 예닐 곱 분이 모여 이야기가 한창이시다.
할머니들이 무슨 이야기들을 저리 재미지게 하실까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할머니들 곁에 가까이 가고 싶었다.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할머니들 가까이에 다가가지는 않았다. 대신 할머니들이 낯선 사람에 대해 경계를 하실까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할머니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는 척하면서.

빨래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슬금슬금 할머니들이 모여 계신 곳으로 다가갔다. 처음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 다음엔 좀 더 슬금슬금 다가가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있는 바로 앞 서가에 가서 섰다.그러다 이번엔 좀 더 대범하게  아예 대놓고 할머니들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역시 서가 앞에 서서.

"시방 멧시나 됐어?"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던 할머니들이 잠시 고요해질 쯤 한 분이 시간을 물으신다. 그러자 모여 계신 할머니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적게보이는 할머니가 "거진 갈 때 되았을걸"하고 답을 하신다.
할머니 말씀에 시계를 보니 다섯 시에서 2분이 빠진다. 오후 4시 58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제 고만 시마이 해야겠네."
"그런데 젊은 색시는 뭣허러 우리 같은 늙으이들 모여 있는데 와서 있나?"
"할머니들이 좋아서요."
"할머니들이 좋아? 아이구 그거 참 고마운 말이네. 근데 늙으이들이 좋긴 뭐가 좋아? 젊은이들이 좋지."
"저는 할머니들이 좋아요. 그런데 할머니들 여기 매일 나오세요?"
"그럼 매일 나오지."
"몇 시에 나오세요?"
"몇시에? 글쎄 몇 신가? 점심들 해먹고 나오니까 대충 한 두 시쯤 될라나?"
"아 두 시여? 그럼 두 시에 오셔서 몇 시에 가시는거예요?"
그러자 연길서 오셨다는 제일 나이가 적은 할머니가 "다섯 시" 하고 답을 주신다.
"아, 다섯 시요. 그러면 할머니들 이곳에 매일 두 시에 나오셔서 다섯 시에 집에 가시는 거예요?"
"그렇지"
"할머니들 매일 이 시간에 여기 나와 계시면 집에서 할아버지가 뭐라고 안 하세요?"
"할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할배 없어."
"할아버지가 다들 안 계셔요?"
"응, 없어. 우린 모두 혼자 살어. 만약에 할배가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집 밖에 오래 나와 있지 못하지."
"혼자 사시는구나."
"그렇지. 다들 혼자 살아."
"여기 나오믄 좋으세요?"
"응, 좋아. 심심하지도 않고.여기 아니면 우린 갈 때가 없어."

심심해서 갑갑해서.
이유를 각자 한 가지씩 들고 모여드는 할매들은 전부 할배가 먼저 가신 이들이다. 할배가 살아계시다면 암만 심심해도 할매들은 감히 이렇게 마실을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시마이라며 일어나신 시간이 5시 2분 전.

할머니들은 시계가 없어도 어쩌면 이렇게 올 시간 갈 시간들을 정확히 아실까? 작은 식빵 찢어서 나눠 먹고 흰봉지안에 있는 튀밥 주먹으로 집어 드시고 두 세 시간 이얘기 저얘기 함께 한 할머니들이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지팡이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신다. 12시 땡 신데렐라 파티가 끝나듯 저녁 5시가 되자 할머니들이 앞서거니 뒷서니하며 집으로 돌아가신다.

할머니 여덟 분 중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시는 할머니는 딱 한 분이시다. 나머지 할머니들은 허리만 약간 굽었을뿐 꼿꼿하게 혼자 힘으로 걸어 가신다. 다섯 시가 되니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들의 뒷 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심계옥엄니도 지하철 역사 할머니들의 이야기마당에 모시고 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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