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를 맞으며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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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를 맞으며 걷다
  • 은옥주
  • 승인 2019.04.2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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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감정과 함께 저장되는 기억 - 은옥주 / 공감심리상담연구소 소장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계절이다.
온 천지에 색의 향연이 펼쳐져 있다.

하얀 목련꽃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우아하게 서있다.
노란 개나리꽃이 분수처럼 곡선을 그리고, 분홍 진달래도 수줍게 송이송이 피어있다.

눈이 시리도록 환한 싸리꽃이 폭죽 터지듯, 꽃망울을 터뜨렸다.
연분홍 벚꽃이 꽃 잔치를 벌인다.

온 세상이 연한 초록으로 물들어 모든 색깔들의 바탕을 이루고 멋진 그림이 되었다.


 


벚꽃을 닮은 고운 친구와 봄이 펼친 축제에 끼어서 걷는다.
친구는 4년째 암으로 투병중이다.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열정적으로 이웃을 돌보고 보듬던 그녀가
갑자기 자궁암 3기 진단을 받았었다.
어제 받은 검사결과가 의외로 좋게나와 우리는 행복한 마음이다.
 
살랑살랑 봄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친구의 손을 잡고 꽃길을 걷는다.
산들바람이 불 때면 꽃잎이 하늘하늘 날아와 우리 어깨에도, 나무에도, 길에도 살포시 내려앉는다.
길이 꽃잎으로 가득해서 꽃무늬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다.
친구의 머리 위에도 꽃비가 조금 묻어있다. 그녀의 환한 웃음이 벚꽃을 꼭 닮았다.

‘휘이익’ 시원한 바람이 불면 꽃잎이 쏟아져 내린다.
온통 환희의 꽃비가 축복처럼 퍼 붓는다.
가슴을 열고 온 마음으로 축복을 받아 안는다.
일년에 단한번의 봄 꽃 잔치에 마음이 소녀처럼 두근거린다.
감사하다..감사하다..감사하다..


 


여기저기 손을 꼬옥 잡은 다정한 남녀가 눈에 띄인다.
문득 대학교 1학년 봄,
미팅으로 만난 남학생들과 창경원에 밤 벚꽃놀이를 갔던 생각이 난다.

한양공대 건축과 학생들과 미팅을 하고 쌍쌍이 때마침 열리는 축제에 간 것이다.
검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벚꽃은 황홀했었다.
그 분위기에 취해 슬며시 손을 잡는 남학생의 적극성에 볼이 빨개지고 가슴도 두근거렸었지!
우리들은 ‘돌림그네’도 타고 빙빙 돌아가는 놀이기구도 타며 밤에 보는 벚꽃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마냥 신나고 행복했었다.


 


친구와 나는 밤 벚꽃놀이의 추억들을 나누며 킬킬거리고 웃었다.
지금쯤은 머리 벗겨지고 배가 남산 만하게 부풀어오른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그들을 생각하면 참 재미있다.
그 때 내 파트너의 얼굴이 아리송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의 즐거웠던 감정들은 참 생생하여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기억은 감정과 함께 무의식에 저장되어 다시 감정과 같이 의식으로 떠오른다' 는 말이 실감이 난다.

좋은 친구와 아름다운 꽃들과 같이 이 봄을 지낼 수 있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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