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고양이님,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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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고양이님,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 이민지
  • 승인 2019.05.31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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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이민지 / NGO 활동가





나는 십년 넘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십년 전에 비해 우리 동네의 달라진 모습을 하나 대라면, 아파트 단지 내에 종종 발견되는 길고양이를 위한 공간이다. 갈 곳 없는 고양이들의 추위를 피하게 해줄 상자가 놓여있거나 그릇 가득 사료가 담겨있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곳이 예전에도 있었는지, 아니면 최근에 생긴 배려인지 확실하진 않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길고양이가 춥다거나 배고프다거나 하는 것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으니까.

꽤 오랜 시간동안 나에게 '동물'에 대한 기억은 동물원에서 보는 사자나 기린을 보면 즐겁거나 신기했던 것이 전부였고, 누군가 키우는 개를 만져본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 귀엽다거나 키우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길고양이라니? 고양이는 무릇 재수가 없다거나 불길했던 존재 아니던가.

그러던 내가 동물과 가까워진 것은 한국이 아닌 캄보디아에서 였다. 4년 전 쯤 한 국제구호단체의 봉사단원으로 파견되어 캄보디아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곳의 풍경을 돌이켜보면 사무실 앞마당에는 개들과 소떼들이 거닐었고, 길가에는 주인 없는 개, 고양이, 닭과 같은 작은 동물들이 형색은 초라했지만 자유롭게 활보하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개와 친해질 수 있었고, 종종 도로에 상처를 입고 다니는 개들을 보며 길 위의 생명들의 고단한 삶을 짐작해 보곤 했다. 그곳에서 살아보지 않았다면 내게 동물들은 그저 여전히 동물원의 캐릭터 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고양이가 내게 특별해진 것은 우연히 맞닥뜨린 캄보디아 길고양이 어미의 출산이었다. 사무실 구석에 새끼를 낳아두고 어미는 며칠째 감감무소식이었고, 울고 있는 5마리의 새끼들은 하루하루 울음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보다 못해 그중에 가장 작고 털도 거의 나지 않았던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곧 죽을 거라면 하루라도 따뜻한 집에서 품어주고 싶었다.

고양이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던 나는 동물용 분유를 타서 아기처럼 안아 먹였고, 출퇴근 때는 물론 식당이나 외근 지역에도 데리고 다니며 먹이고 재우고 애를 썼다. (고양이를 키우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라 영역에서 벗어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시행착오가 많았던 때였다.) 손바닥 만했던 새끼고양이는 다행히 무럭무럭 자라줬고 처음 사람이 아닌 존재에게 주었던 정이 특별했는지 나에게 그 고양이는 가족이 되어 한국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만난 인연까지 더해 2마리 고양이의 집사로 살고 있다.

고양이가 가족이 되자 차츰 길 위에 존재하는 동일한 개체에게도 관심이 생겼다. 마치 부모가 되면 자식과 또래인 친구들만 봐도 “자식 같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처럼 말이다. 뉴스에 나오는 동물학대와 길고양이의 죽음들이 더 이상 내겐 다른 세계의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길 위의 생명들에게 관심이 생기고 나니 안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특히 한국의 길고양이들이 사람에게 보이는 경계와 두려움은 이상할 만큼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었다. 올해 싱가포르와 케냐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싱가포르의 도로에는 고양이가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태연히 몸단장을 하고 있었고, 케냐 나이로비 쇼핑몰에서는 길고양이들이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유유히 가게 사이를 거닐었다. 사람들이 길가의 고양이나 개에게 혐오를 갖지 않고, 고양이들도 사람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싱가포르에서 "그래, 선진국은 다르구나"라고 들었던 생각이 케냐에서는 물음표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경제적인 풍요가 아닌 생명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었다는 것을.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 (The greatness of a nation and its moral progress can be judged by the way its animals are treated.)” 마하트마 간디의 유명한 말이다. 물론 길고양이들이 사람에게 보이는 친근감과 평화로움으로 시민의식의 높고 낮음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간디의 말에서, 그리고 내가 경험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태도에서 왠지 모르게 착잡한 마음이 든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일부이다. 내가 태어나 우연히 이 도시에 있는 것처럼, 길 위의 작은 동물들도 그러하다. 그런데 자연의 허락 없이 인간이 마음대로 콘크리트로 길을 내고, 아파트를 짓고, 쓰레기장을 지정해놓고, 쓰레기통을 뒤져 먹이를 찾는 생명들에게 인간의 잣대로 혐오와 미움을 선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태인가 생각해본다.

꼭 고양이가 아니더라도 좋다. 길에서 마주하는 생명들, 또는 인간 외의 존재에 관심이 없어도 좋다. 다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고양이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누그러지기를, 그리하여 고단한 길 위의 삶이 조금은 살만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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