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검여 유희강과 인천
상태바
서예가 검여 유희강과 인천
  • 박상문
  • 승인 2019.06.03 06: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상문 / 지역문화네트워크 공동대표




검여 유희강(이하 검여) 선생은 누구인가? 그는 지금의 인천 서구 시천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선대들은 16세기부터 오랫동안 서구 시천동과 검단 오류동, 김포 당하동 일대에서 살아온 유서 깊은 문사 가문이다. 그는 일찍이 가학으로 유학을 공부하였고 20대에는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학원에서 유학을 전공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 상해 등지에서 동양서예와 서양미술을 배우면서 신문사 기자로 생활해 왔다. 그 후 광복을 맞아 고향 인천에 돌아 온 검여 선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활발한 문화운동을 하면서도 서예가로서 독보적인 창작 활동을 견지하였다. 그는 문화행정에도 관여하여 이경성 선생에 이어서 인천시립박물관 2대 관장을 역임하였으며 인천시립도서관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인천 최초라 일컬어지는 인천 문화유산에 대한 저술 <仁川의 案內: 古跡, 名勝, 天然記念物>을 편찬 발간하였다.
 
최근 검여 선생의 작품들이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소식은 인천문화계에 충격을 주었다. 인천문화계가 충격을 받을만한 이유는 그의 생애와 예술성만으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그의 후손들이 그동안 아버지 검여 선생의 작품을 인천에 기증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사되지 못하였다는 후문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앞서 말하였듯 검여 선생의 가문은 인천에서는 보기 드문 유가 집안으로서 선대들은 시문에 밝은 대표적인 문사가문이다. 그러나 정치색이 옅은 문사집안이었지만 나라가 혼란하고 정치가 불의 할 때는 필봉으로 저항하고 훈계한 문집과 고향 인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시집들이 여럿 있다. 그 대표적인 시문집이 <시계세고(柴溪世稿)>인데 이 문집은 검여 선생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그를 키운 백부의 유고를 정리한 영인본으로 현재 성균대학교도서관에 있다. 이 중 그의 백부 유정무 선생의 <석전유고(石田遺稿)>중 한글로 번역한 시국 한시 <문이완용피척> 한 편을 옮겨본다.
 
더러운 행실 밝게 드러나 선조를 욕보이고,
종자들도 어찌하여 푸른하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구나.
죄는 가득차고 악업은 쌓여 끝내 면할 길이 없으니,
흉악한 가슴 간사한 창자 더욱 더 가련하다.
 
-<聞李完用被刺>, 한글번역 남동걸박사
 
검여 선생 일가의 인천사랑은 선조들의 이름과 호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의 고조부 지익의 <계은유고>의 桂隱은 계양산 뒷자락 시천동 향리를 따서 지은 호이고, 지익의 동생 지흡의 호는 계호이다. 조부 태동의 호 또한 계북(桂北)으로 계양산 뒤자락 고향에서 따온 것이며 선대들의 유고 문집 <시계세고>의 시계는 지금의 계양산 뒷자락 굴포천이 된 시시내의 한자 표기이다. 시시내 진주유씨 문중의 인천과 문화 사랑에 대한 가풍은 얼마 전 이희환 박사가 펴낸 “청년 김구가 만난 인천, 사람들” 출판기념회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당일 출판기념회에는 시천동 진주유씨 총친회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고 검여 선생의 후손인 3남매도 자리를 함께하여 축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마을의 한 어른은 큰 도서관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인천 서구 시시내 진주유씨 일가는 4백년에 가깝게 한 마을에 살면서 인천의 정신문화와 예술분야에 끼친 영향이 크다. 특히 이 가문을 대표하는 서예가 검여 선생의 업적과 작품은 더욱 더 크다. 그렇기에 그분의 서예 작품 일천여점이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소식은 인천의 한 어른뿐만 아니라 한 가문이 그동안 인천에서 차곡차곡 지어온 도서관을 잃은 것과 같은 심정이기에 인천으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인천문화계가 오래전부터 서예를 인천의 대표 예술장르로 여겨온 이유가 있다. 그것은 검여 선생이 있기 때문이고, 동정 박세림, 우초 장인식, 송석 정재홍, 무여 신경희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이경성 선생께서 말씀하신 “추사 이래로 최고의 서예가 검여 유희강”의 작품이 인천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인천에 건립될 인천시립미술관에 대형 콘텐츠 하나를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검여 선생의 작품이 그의 모교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어 잘 보관 되게 된 것은 수장이 필요한 시점에서 볼 때 적절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천의 입장에서 볼 때 검여 선생의 작품이 인천을 떠나는 것은 그를 잃은 심정처럼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떠난 임을 잡지 못한 안타까움만 토로할 수 없는 일, 돌아오길 바라는 미련을 가져보자. 그의 작품이 인천의 미술관에서 박물관에서, 그와 선대의 정신을 인천의 도서관에서 자주 만나게 되기를 바래보자.
 

*다음 칼럼에서는 자꾸 반복되는 인천문화 콘텐츠 유출 문제와 뒷북 문화행정을 개선하는 방안을 게제 하고자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