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문턱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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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문턱을 넘어
  • 유광식
  • 승인 2019.06.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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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경동 애관극장 / 유광식

 
애관극장 매표소, 2019ⓒ유광식
 

내 머리 속에는 항상 숫자들이 난립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이라는 좌표 위를 거닐기 위해서는 이정표가 될 숫자들을 알고 있어야만 길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는 존재를 대신하기도 한다. 태어난 년도나 나이, 주민번호, 학년과 반의 번호, 번지수, 집의 동 호수, 가격, 거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 속에서 숫자로 엮어진 장우산 하나씩 쓰고 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은 누구나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애관극장 후문 골목길. (우측이 1관 스크린 외벽), 2015ⓒ유광식
 

인천의 구도심인 동인천 지역과의 인연이 시작된 시기는 2011년이었다.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되면서 5년을 지지고 볶았던 시절이 있다. 한 눈에 봐도 모텔을 개조해 만든 티가 역력한 연녹색 원룸 건물에 입주하던 날이 기억난다. 유난히도 햇살이 잘 들던 창 넓은 3층 공간이었지만 주변의 숙박업소 및 종교시설에 의해 맘 놓고 창을 개방할 수 없었고, 아쉬운 각설탕 맛처럼 저렴한 월세 탓만 했다. 그래도 나는 집 근처에 애관극장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긍심이 있었다. 유서 깊은 극장이기도 했고, 극장이 거주 공간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스트레스 킬러 300원, 2016ⓒ유광식
 

가끔 애관극장을 찾아 영화를 본 기억은 있지만 괜찮은 영화 한 편을 가장 넓은 1관에서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기회는 가까운 거리만큼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2016년 봄, 경동을 떠나면서 생각한 아쉬움이 그 부분이었다. 1관에 대해 뭔지 모를 애착이 깊었는데 그걸 풀지 못하고 떠나는 것 같아 아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역뉴스에 간혹 나오는 사진 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2017년 7월 초여름에 영화 <옥자>를 만든 봉준호 감독의 무대인사가 있었다. 바로 애관극장에서 말이다. 그때 봉 감독은 이곳이 신성일, 엄앵란의 약혼식이 있었던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애관극장 1관 2층 좌석에서, 2019ⓒ김주혜

 
애관극장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변모했다. 여느 프랜차이즈 극장과 대결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이곳 만큼 인천사람들에게 추억이 가득한 장소는 드물다. 그래서일까. 아이였을 때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이 아빠가 되어 아이를 데리고 애관극장을 찾기도 하고, 청년이었던 시절을 뒤로하고 연세 드신 분들도 눈에 띈다. 극장 홈페이지에는 100여 년 전통의 극장이라는 문구와 함께 100년 후 경동이 시네마 거리가 될 거라는 선언이 적혀 있다. 지역 영상문화 발전과 다양한 기획행사를 마련한다는 문구가 거짓말이 아니라 실로 힘이 있어 보였다. 

로고가 이색적인 애관극장은 표 값이 일단 저렴하다. 성인 7,000원이다. 주말이었음에도 말이다. 9,000원 하던 금액이 7,000원이면 어떤 아름다운 기분이 든다. 1관은 2층 구조이다. 관객들 대다수가 2층 좌석을 원해서인지 2층으로 모두 올라왔다. 스피커 위 먼지도 보이고 옛 극장이다 보니 앞뒤 간격이 좀 좁고 시설이 낡긴 했지만 그런 맛이려니 하며 영화를 본다. 거의 맨 뒤쪽이어서 그랬는지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도 조금은 들렸고 에어컨 소리도 나서 약간의 불편으로 다가왔던 부분이 오히려 애관극장을 떠올리게 되는 장치로 작용하는 건 아닌가 싶다.

 
부평 대한극장 계단 중간에 전시된 영사기의 영화필름, 2016ⓒ유광식

 
올해 4월에는 세월호 주간에 애관극장에서 관련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상업적인 시각이 아닌, 지역 문화와 사회 문제를 다함께 바라보는 공간으로 기능한 것이다. 애관이 자리한 경동의 영광은 이제 문헌에서만 자주 거론되고 있지만 이곳을 아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다.

나는 장소의 생명이 시대의 영광 뿐 아니라 슬픔을 보듬는 의식을 통해서도 지속된다고 믿는다. 가까운 마음이었지만 먼 시간 돌아 다시 찾은 애관극장에서 관람한 영화 한 편. 주말의 시간이 영광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무섭게 왁자지껄하게 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진입해 빗자루로 의자 사이사이 떨어진 팝콘을 매섭게 쓸어 담는 3명의 스텝도 다 애관의 기억이다. 

경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작은 공간에는 시간이 넘보지 못할 것들이 적잖이 숨어 있다. 프랜차이즈 상점이나 커피숍, 주택, 영화관 들이 있지만 우뚝하니 그 자리에서 사람을 품는 애관극장이 마치 어미닭 같기도 하다. 나는 지난 6월 초 지인과 함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1관 2층에서 관람한 뒤, 흡족함을 안고 귀가할 수 있었다. 인천은 그 안에 사랑할 공간을 지니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꼭 애관극장이 아니더라도 그런 공간으로 느껴지는 곳이 있다면 조만간 그 문턱을 넘어보면 어떨까.

 
영화가 끝나고, 2019ⓒ김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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