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프리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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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프리카 !
  • 허회숙
  • 승인 2019.07.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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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허회숙 /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인천부의장




여행을 떠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 연유로 남들이 다닌 곳은 어지간히 다녀 보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 아프리카 여행은 일종의 금기였다. 비행시간만도 열여섯 시간 이상 걸리고, 여러 번 비행기를 갈아타야 해서다. 하여 오래 전에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7년 가을 남미 여행을 순조롭게 다녀왔고, 인생의 의미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아프리카 여행에 대해서도 다시 고려해 보게 되었다.

남편은 올해 팔순이다. 고혈압에 당뇨도 있다. 19년 전에는 한쪽 고관절 수술을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장거리 여행의 대미를 아프리카 여행으로 장식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용기를 내어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나 역시 2018년 6월까지 현역처럼 활동을 하다가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물러나자 나도 모르게 차츰 위축이 되고 의기소침하던 때였다. 그래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힐링과 새로운 충전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홍콩에서 환승한 남아공 항공사는 깨끗하고 서비스도 좋았다. 물이나 술을 달라고 하면 한 번에 두 병씩 주는 식으로 인심도 후했다. 애주가인 남편은 여행의 들뜬 기분도 있어서였을까. 남편은 위스키, 와인, 비어를 골고루 달라고 해 주량 이상을 마셨다. 18명 일행 중 가장 고령인데다, 여행 직전 고관절이 삐끗하는 바람에 불편을 호소하여 병원에서 엑스레이까지 찍었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하여 떠난 여행이었다. 그런데 인천 공항에서 다시금 고관절이 삐끗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한 터였다. 가뜩이나 조마조마한 판인데 조금도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남편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여 은근히 눈치를 주곤 했다.

인천공항에서 낮 1시의 미팅을 시작으로 오후 4시 30분 홍콩으로 출발했다. 길고긴 비행시간이었다. 30여 시간 만에 처음 목적지인 케냐의 나이로비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도착하여 목욕을 한 후 케냐 사람들의 국민 요리라는 야생고기 숯불 바비큐인 야마초바로 저녁 식사를 하며 사파리 캣츠 쇼라 불리는 역동적이고 현란한 아프리카 전통 공연을 흥미롭게 관람하였다. 아프리카 문화 체험을 최초로 한 좋은 기회였다.
 
다음 날은 경비행기와 자동차로 5시간을 달려 세렝게티에 도착하였다. 북쪽으로는 케냐의 마사이마라, 남쪽으로는 옹고롱고로와 연결되어 있는 넓이 14,763평방미터의 거대한 국립공원이다. 숲과 나무가 적은 사바나 지역인 국립공원 내에는 약 3,000만 마리의 초식동물과 야생동물이 있어 어디를 가든 쉽게 코끼리, 기린, 얼룩말, 영양 등의 무리들과 온갖 종류의 조류 떼를 마주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사자, 포범, 코끼리, 버팔로, 코뿔소는 빅 화이브라 하여 가장 인기 있는 동물들이다. 게임드라이브는 6인승 차를 타고, 차 안에서만 동물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차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절대 금지 사항이었다.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낮에는 주로 초식 동물, 일몰 전에는 육식동물을 볼 수 있었다. 4대의 차에 나누어 탄 우리 일행은 야생동물을 만날 때마다 모두 일어서서 환호를 하고 사진을 찍으며 어두워질 때까지 게임드라이브를 즐겼다.



 

게임드라이브를 마친 후, 세렝게티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마사이부족 마을을 찾아 그들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다. 대부분 상업화가 되어서 일정 금액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마을 방문이 허용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성인 남녀 수십 명이 격렬한 전통 민속춤으로 환영의 인사와 함께 마사이 부족 여자들이 화려한 목걸이를 우리 목에 걸어 주며 함께 춤을 추는 등 즐거운 체험의 시간을 가졌다. 볏짚으로 지어진 움막 형태의 집 여러 채 중 한집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속에 빨간 불씨 외에는 살림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인간이 이렇게도 살 수 있다니 하는 짜안한 마음으로 한 곳에 들르니 눈이 커다랗고 순진한 어린애들만 수십 명 모아 놓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사진도 함께 찍게 해 주었다. 모두들 그 애들이 조금이나마 인간답게 사는데 도움이 되라는 심정으로 가운데 놓여 있는 모금함에 기꺼이 돈을 넣고 나왔다.
 
마사이 부족마을을 떠나 올두바이 계곡으로 향했다. 탄자니아 올두바이 계곡은 1959년 영국 고고학자 루이스 리키와 메리 리키 부부에 의해 초기 인류의 뼈와 발자국 화석을 발견한 곳이다. 약 360 만 년 전 이곳에서 탄생한 인류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고 한다. 과거에는 방대한 호수였던 곳으로 전해지는 올두바이 계곡 입구에 위치한 작은 박물관에 초기 인류에 대한 정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무리한 일정에 모두들 조금씩 지쳐 가던 여행 6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그날도 술을 조금 과하게 마신 애 아빠가 화장실에 들어간 후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쿵’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달려가 보니 애 아빠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흔들어 깨우면서도 어찌하면 좋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가슴만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다행히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남편은 잠깐 아뜩하여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애 아빠가 쓰러졌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여행을 계속했다. 그 후로 이틀 간은 조심하더니 다시 전과 같이 술을 마시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오히려 내가 은근히 눈치를 주는 것이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여행은 누구든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일행들은 모두가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즐거운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틀이나 계속 입은 티셔츠조차 바꾸어 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옷을 바꾸어 입으라고 하자 일행들이 듣는 자리에서 “아~ 여기 패션 쇼하러 왔어?” 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매순간이 조마조마했다. 나는 애 아빠가 쓰러진 순간부터 ‘무사히 귀국하게 해 주십사’ 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럼에도 애 아빠는 조금도 미안 해 하는 기색이 없어보였다. 자연 여행의 즐거움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몇 배나 웅장한 빅토리아 폭포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아름다운 쌍무지개가 떠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남아공의 희망봉에서 인도양과 대서양을 함께 바라보는 감격스러운 순간에도, 펭귄과 물개 서식지에서 그들의 귀엽고 신기한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 여행이 안전하게 끝날 수 있기만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럭저럭 긴 여행에서 돌아왔다. 애 아빠는 여행 중의 일은 까마득히 잊었는지 오히려 자신감이 살아나는 모양새였다. 여독도 있으련만 친구들과 2박 3일의 여행도 다녀오고 여러 모임에 나가서 자신의 아프리카 여행 무용담을 자랑하며 활기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귀국 후 일주일 정도는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후부터 가슴이 울렁거리고 불안하여 좌불안석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터져나왔다. 게다가 우울증과 더불어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약을 복용하자 잠재되어 있던 치질이 도지고, 기력도 쇠약해져 백내장의 진행 속도가 빨라져 눈이 침침해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증세가 일시에 나타났다. 식욕마저 없어져 한 달 사이에 체중도 3kg이 나 빠졌다. 더럭 겁이 난 나는 이 병원, 저 병원, 한방 병원 등을 찾아다녀야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었다.

3월 말쯤 발병하여 두 달 정도 병원 약을 복용하였다. 남편을 비롯하여 딸과 아들, 친정 언니들과 동생, 그리고 평생 멘토이셨던 옛 은사님의 사랑과 관심 속에 점차 마음과 몸의 병을 치유하게 되었다. 또한 1980년대에 같은 학교에서 5년 동안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 30여 년 간 교유하며 그 인품을 존경해 오던 유 교장선생님께 여러 차례 상담을 받은 것이 큰 위안과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14살 단발머리 여학생 시절부터 내 평생의 멘토이신 강 장로님께는 10여 년 전부터 매일 저녁이면 안부 전화를 드리곤 했었는데, 내가 발병하자 그분은 아침, 점심, 저녁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전화를 하여 내 기분을 살피시고 자신의 집으로 와서 맛있는 것을 먹으라고 귀찮을 정도로 들들 볶으시곤 했다. 내 전화 한 통으로 희비가 엇갈리시는 강 장로님께 조금이라도 안심하실 수 있도록 해 드리고 나도 좀 편해지기 위해서 좋은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는 날들을 보냈다. 한 달이 지나자 식욕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불안하던 증세도 없어지고, 두 달이 지나고 나자 여러 가지 신체적 이상 증세도 차츰 나아지게 되어 병원 약을 끊게 되었다.
 
충분한 힐링을 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리라는 야무진 꿈을 갖고 떠났던 아프리카 여행 후 무너진 나를 추스르는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나의 영성을 높여 참된 신앙심을 찾고, 사랑과 관심을 진실되게 주고받는 인간관계 뿐이라는 사실의 재확인이었다. 그리하여 강 장로님의 허락 하에 효도 차원에서 건성으로 다니던 교회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이 교리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발병과 치유의 과정을 겪으면서 내 교만의 탑이 허물어지고 좀 더 겸손한 자세로 무릎 꿇고 엎드려 절할 수 있는 나를 찾았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아프리카 여행의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아, 아프리카 여행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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