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래, 아니면 나랑 사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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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래, 아니면 나랑 사귈래?
  • 박교연
  • 승인 2019.07.09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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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2011년 무한도전 가요제에서 발표된 10cm의 ‘죽을래, 사귈래’ 노래 가사를 보면  “너 정말 죽을래, 사귈래, 아니면 나랑 살래, 어떡할래. 너 진짜 이럴 거야? 오빠가 너 혼낼 거야. 오빠가 너 벌줄 거야”라는 가사가 나온다.

 

2016년 국정감사 때 경찰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 해 동안 데이트 폭력으로 검거된 사람은 8,367명에 이른다고 한다. 또, 한국 여성의 전화가 2016년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연인관계였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31명,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65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대한민국의 수많은 오빠는 여성을 혼내고 벌주는 걸 넘어서 살해하고 있다.

 

데이트폭력의 가해자들은 대부분이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판사도 가해자의 말을 받아 똑같이 말한다. 며칠 전 7월 4일 여자친구를 살해한 20대 남성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어준 대전고법 김성주 부장판사는 “피고인과 피해자가 주고 받은 문자메시지 등을 보면 이들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고 감형의 이유를 밝혔다.

 

이러한 판결은 작년 7월에도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39살 남성 이모씨가 사귀던 여자친구를 주먹으로 여러 차례 폭행한 결과, 여성은 의식을 잃은 뒤 끝내 사망했다. 이씨는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됐지만,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석방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이씨가 피해자를 너무 사랑해서 피해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고자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감형의 요소가 아니다. 아니, 데이트폭력이 있던 관계에서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가해 행위를 하는 남성은 폭력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여성의 공포를 이용하여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다. 이때 여성은 남성에게 결코 대등한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한다. 그래서 데이트폭력은 ‘데이트’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의 문제다. 개인 간의 치정문제가 아니라 폭력을 동반한 권력 확인의 문제, 즉 사회문제이다. 한국여성변호사회의 장윤미 변호사 또한 “오히려 그런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폭행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건, 감형이 아니라 가중의 요소로 참작해야 한다”라고 7월 4일 집행유예 판결에 의문을 제기했다. 
 

 



2016년 2월 대구남부경찰서는 20명의 남성 경찰과 일반 여성 20명을 모아 데이트폭력 근절을 위한 미팅 행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대구 경찰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여자 페친분들 주목~!! 데이트폭력 근절을 위해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20대 초반에서 30 초반 사이의 전도유망한 젊은 경찰관들과 만남을 준비했습니다. 잇남들과의 치맥 파티. 얼른 신청하세요. 오빠가 지켜줄께!!”라는 이벤트가 올라왔다.

 

여성단체는 데이트폭력이 장난 같냐고, 신고 접수된 것만 한해 8,000명 이상이 겪는 문제인데 이게 남자 경찰관과 데이트를 하면 끝나는 문제냐고, 데이트폭력을 끝내고 싶으면 가해자에 대한 수사를 엄밀히 진행하라고 신랄한 비판을 내놓았다. 이에 경찰은 이 이벤트가 “데이트폭력을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여성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신고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취지”라며 해명했다. 여성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보다 가해 행위가 범죄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맞지 않냐는 물음에는 “가해자에 대해서는 신고가 들어오면 신경 써서 철저하게 수사를 한다”며 “이는 데이트폭력이 범죄라는 인식을 위한 예방캠페인 차원”이라고 답했다.

 

3년 전 일이지만 이걸 통해 우리는 우리나라 법 집행 기관의 데이트폭력에 대한 의식 수준을 알 수 있다. 대구 경찰에게 데이트 폭력은 ‘오빠가 지켜주면 되는 문제’이며, 여자가 ‘데이트 폭력은 범죄’라는 의식을 단단히 하면 해결되는 문제다. 다시 말해 여자가 나쁜 남자 만나지 말고 착한 남자, 좋은 남자 만나면 해결될 문제란 거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엔 나쁜 남자가 너무 많다. 2018년 서울시가 서울 거주 여성 2천 명을 대상으로 데이트폭력 피해 실태조사를 한 결과 1,770명(88.5%)이 데이트폭력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0명 중 8명, 이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숫자다.

 

경찰청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사범은 2014년 6,675명에서 매년 1,000명 가량 급증하고 있다. 2017년에는 피해자가 드디어 1만 명을 넘겼다. 서울시 실태조사에서 대다수 여성이 데이트폭력 원인으로 ‘가해자에 대한 미약한 처벌’(58.7%)을 꼽았는 데도 불구하고, 2019년 현재까지 데이트폭력범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다. 가해자에게 적절한 처벌과 피해자의 안전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데이트폭력은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미명 하에 목숨을 잃는 여성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이건 지난 몇 년간 통계를 비춰봐도 예견된 결과이다.

 

폭력과 인권침해는 권리와 목소리가 없을 때 더욱 심화한다.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에게 착한 오빠는 필요 없다. 오빠의 온정에 기대어 세상을 살아나가기엔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다. 여성을 폭력에서 구해줄 수 있는 건, 성문화된 데이트 폭력법(권리)과 믿을 수 있는 여성 법 집행관(목소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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