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오토젠자이'와 '팥알'의 단팥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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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오토젠자이'와 '팥알'의 단팥죽
  • 이권형
  • 승인 2019.08.1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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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이권형 / 음악가




지난 5월, 4박 5일간 일본 간사이 지방 도시들을 방문했다. 주로 개천을 따라 형성된 오사카 중심 거리인 ‘도톤보리(道頓堀)’에 머무르며 그 주변 골목을 산책했다. 한번은 도톤보리 같은 번화가와 어울리지 않는 예스러운 정취의 골목이 하나 눈에 띄었다. 풍경이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다. 다음 날 그 골목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되기 전까진 말이다.
 
먹는 걸 좋아하는 나는 식사 후 디저트 집을 검색하다 100년이 넘었다는 팥 가게를 발견했다. 가게를 찾아가는 길에 전에 본 골목이 나타났다. 작은 선술집을 비롯한 노포(老鋪)들이 둘러싼 골목의 안쪽은 사람들이 물을 끼얹으며 기도를 올려 이끼로 덮인 아담한 불상이 지키고 있다. ‘호젠지요코초(法善寺?町)’로 불리는 그 골목은 ‘호젠지(法善寺)’라는 절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2차대전 당시 공습을 당해 불상만 남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한다.
그 풍경 한편을 내가 찾아간 ‘메오토젠자이(夫婦善哉)’라는 팥 집이 지키고 있었다. 특이하게 단팥죽이 두 그릇에 나뉘어 나왔다. 가게 이름이 한국말로 ‘부부 단팥죽’ 정도 된다. 나뉘어 담긴 팥죽을 함께 먹으면 사이가 좋아진다고. 척 보기에도 사연 많은 가게 같았다. 알고 보니 ‘호젠지요코초(法善寺町)’와 함께 유명 소설과 드라마, 대중가요 노랫말의 무대로도 유명한 장소였다.
 
인천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으로 내려가는 갈래 길에 서면 공자 석상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공자상이 있는 계단 길을 경계로 좌측은 일본, 우측은 청나라의 조계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일조계지 계단’이다. 그 계단을 중심으로 건축물의 외관 역시 다른 형태를 보인다. 그런데 현재 해당 지역 건물들의 외관이 이국적인 것은 근래 들어 관 주도로 외관만 조악하게 보수했기 때문이지 당시 건축물이 잘 보존됐기 때문은 아니다. 그나마 청일조계지 계단에서 내려와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드물게 그 원형이 보존된 일본식 가옥들을 볼 수 있다.
‘인천 구 대화조 사무소’, 개항기 일본 하역회사 사무소로 인천 개항장 유일의 ‘정가(町家, 마찌야-길거리 주변에 2층 이상 지어 1층은 점포로, 2층은 주택으로 활용하는 건물)’ 형식 건물로, 건축사적인 가치 외에도 일제강점기 하역노동자 착취가 이루어졌던 현장으로 역사적 가치 또한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567호로 지정됐다.
 
현재 대화조 사무소 건물은 ‘팟알’이라는 팥 디저트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팟알은 나에게 팥의 깊은 단맛을 처음 알게 해준 곳이다. 나는 원래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뒤늦게 단맛의 풍미를 알게 해준 팟알 디저트는 나에게 중요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메오토젠자이’는 팥 자체에서 집요하게 뽑아낸 단맛이 일품이라면 ‘팟알’은 다른 재료와의 조화가 풍미를 준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가게의 팥 맛이 더 뛰어난지 비교하는 건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든 내가 그 음식을 먹을 때 깊은 맛에 감동했으며, 그로 인해 그 맛의 기원에 대해 고찰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팥에서 어떻게 그런 깊은 단맛이 날 수 있는 걸까. 단순히 내가 미식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단팥죽과 젠자이의 미세한 맛 차이를 기억할 만큼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는 아니다. 더 진한 단맛은 얼마든지 흔한 세상이니까.
 
전쟁의 상흔을 품은 호젠지요코초에서 젠자이 맛을 음미하고, 팟알의 단팥죽을 맛보며 개항기 하역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생각해본다. 복잡하고 오랜 과정을 거쳐 깊은 단맛을 내는 팥 요리와 장소에 얽힌 사연들이 서로 절묘하게 중첩된다. ‘팟알’과 ‘메오토젠자이’, 두 팥 집을 유난히 곱씹게 되는 건 깊은 단팥의 향이 그 장소들이 간직한 사연들과 함께 배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두 장소이지만, 그곳은 여전히 삶의 터전이고 복잡한 시대적 상황도 유구한 단팥 맛의 깊이를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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