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건국의 기틀 혈구(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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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의 기틀 혈구(강화도)
  • 이한수
  • 승인 2019.08.23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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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인천사] KBS 드라마 [태조 왕건]


강화도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예성강 하구 벽란도.
 
 

지난 7월 27일 고려 건국 1101주년, 종전협정 66주년을 맞아 ‘벽란도 뱃길을 열다’를 주제로 한강 배 띄우기 행사가 열렸다. 교동대교만 지나면 지척에 벽란도가 있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다. 분단이 되기 전에는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혈구도(강화도)와 벽란도는 한 동네였다. 고려를 세운 왕검의 집안이 호족 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이곳 벽란도 강화도 일대이다. 그만큼 혈구는 지정학적 요충지였으며 우리 역사 격변기 주요 무대가 되었다.

드라마 [태조 왕검]의 도입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왕륭, 왕건 부자(父子)가 예성강 하구에서 거센 파도가 밀려오는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왕륭이 아들 왕건에게 말한다. “장보고 장군을 기억하느냐? 너희 할아버지와 같이 당나라에서 이곳 신라로 건너오신 분이니라. 장보고 장군께서 간악한 무리에 의해 세상을 떠나신 후에 너의 증조부님께서는 이곳 송악에 터를 잡으셨느니라.” 이 대목을 보면서 신라를 멸하고 고려를 세울 때 당나라가 깊숙이 관여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혈구(穴口)가 서해 해상 교통로의 중심이라 고려 도읍지가 되는 게 당연하고 가까운 황해 건너편 산동반도는 장보고의 근거지였던 만큼 고려 건국에 장보고가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은 되는데 왕건 집안이 당나라 왕족 후손이라니 참 난감하다. 고대 사서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과 관련된 여러 기록이 남아있기는 한데 설화로 치부될 뿐 역사 사실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역사 교육은 이 문제를 아예 다루지도 않고 있다.
 
먼저 그 시대 신라, 고려 주변 역사를 간략히 훑어보자. 수차례에 걸친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칠 정도로 강성했던 고구려는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면서 668년에 망하고 만다. 나당연합으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치루며 자주권을 지켜냈고 698년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주축이 되어 발해가 성립되면서 남북국시대가 열린다. 나당전쟁으로 대적했던 신라와 당나라는 성장하는 발해를 제압하기 위해 동맹을 맺지만 발해는 날로 강성해져 732년에 당나라를 정벌하기까지 한다.

당나라는 내부 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거란은 요 제국을 이루면서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거란의 침략으로 발해는 926년에 멸망하고 후삼국으로 분열되며 혼란을 겪고 있던 한반도에서는 패서지역(예성강 유역)의 호족 세력이 패권을 장악하면서 고려가 건국되었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는 막을 내리고 고려시대가 열린 것이다.

 
강병석 소설 [궁예] 삽화
 
 
남북국시대 말기 반도 북쪽 대륙의 발해가 망하고 한반도 남쪽 끝 신라 왕실 1000년의 영화가 저물어갈 무렵 한반도 한가운데 혈구에서 새로운 나라 고려가 세워지게 된 데에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900년에 견훤의 후백제, 901년에 궁예의 후고구려가 세워지면서 통일신라는 극심한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북방 대륙에서 거란과 발해, 당나라 삼국 간의 각축이 벌어지면서 한반도 신라는 진공상태에 빠져 들었고 지배집단은 안일한 이권 다툼으로 내부 분열이 극심해진다. 여러 호족 중에서 기호지방의 궁예, 호남지방의 견훤이 먼저 두각을 나타냈지만 나중에 패서지방(황해도)에서 왕건이 점차 세력을 구축하면서 한반도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왕권이 약화되면서 지방 호족 세력이 발호한 것이라 서술하고 있지만 당시 세력가로 등장한 궁예, 견훤, 장보고는 모두 왕실의 친인척이었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패서 호족을 제외하고는 왕실의 내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은 패권을 장악한 후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과 혼인시켰지만 패서 호족은 신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적이 없으며 패서 지방은 수도 금성에서 가장 먼 변방이었는데 어떻게 후삼국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후삼국시대 지방 호족의 패권 다툼을 그려낸 사극은 유별나게 많다. 특히 궁예와 왕건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많은데 그만큼 스토리가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이광수의 [마의태자], 신채호의 [일목대왕의 철추], 광복 후에 발표된 박종화의 [삼국풍류] 등 초기 역사소설들이 모두 궁예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궁예의 일생이 너무 기구하여 절절한 이야기의 소재로 아주 잘 맞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 경문왕의 후궁이 아들 궁예를 낳으면서 두 왕후의 미움을 받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아들 만은 살리기 위해 누각 아래로 갓난아이를 던진다. 아래에서 유모가 아기를 받다가 눈을 찔러 아기는 애꾸눈이 되었고 다 커서 자신의 끔찍한 비화를 알게 되면서 궁예는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는 스토리는 대부분의 소설이 이야기의 뼈대로 삼고 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스토리는 시대 현실을 조망하고 역사의식을 깨우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패서 지역이 발호하게 된 지정학적 요건과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형상화해낸 작품이 없을까?

 
고려시대 벽란도 상상도. [EBS 스토리 한국사]
 

근래로 오면서 후삼국시대 배경 사극은 궁예보다 왕건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최인욱 [태조왕건], 박연희 [송도의 봄], 김성한 [왕건], 신봉승 [왕건], 최범서 [고려 태조왕건] 등의 소설이 발표되었고 2000년 들어 200회에 걸쳐 방송된 드라마 [태조 왕건]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왕건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자연스럽게 후삼국시대 한반도 정세를 포괄적으로 조망하게 만든다. 황해 해로의 요충지로 왕건 집안의 근거지가 된 한강 하류 패서지방과 왕건이 정벌하면서 삼국 통일의 교두보가 된 나주 영산강 유역은 당대 시대사 흐름을 좌우하게 만드는 지정학적 요소(要所)이다. 그러므로 왕건을 주인공으로 그려낸 사극은 궁예를 주인공으로 그려낸 사극에 비해 당대 역사 인식에 많은 도움을 준다.
 
왕건의 치적을 주로 그려낸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은 도입부에서부터 왕건 선조의 대륙도래설을 제기하면서 흥미를 끌었다. 승려 궁예는 환속하여 죽주(경기도 안성)의 세력가인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다시 북원(강원도 원주) 지방의 양길 휘하로 들어가 크게 세력을 키워 명주(강릉), 철원, 송악(황해도 개성)까지 장악하게 된다. 송악에서 패서 호족의 후원으로 고려를 건국하고 도읍을 건설하였으며 왕건을 수하 군장으로 등용한다. 청주 지방의 아지태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게 되는데 수도 이전은 패서 지역 호족의 반발을 사게 되고 집권 세력은 점차 궁예파와 왕건파로 분열된다. 왕건은 금성(나주) 정벌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 궁예를 능가하는 지지를 받게 된다.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고려군이 나주 영산강 하구로 상륙하는 장면.
 
 
왕건 집안이 예성강 하구, 혈구에서 번성했던 호족이었다는 점과 왕건이 금성(나주)을 점령하면서 그 지방 호족 오다련과 인척 관계를 맺은 역사적 사실은 심청 설화와 지리적 배경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 나주 바로 옆의 곡성은 심청 설화의 발상지이며 혈구(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백령도에는 심청이 재물로 바쳐진 인당수가 있으니 왕건 집안의 해상 활동 무대는 심청 설화의 배경인 백제의 환황해(環黃海) 권역과 겹친다.

그런데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에는 한강 하구 혈구에서 서해 직단 항로를 건너면 바로 닿게 되는 중국 산동성이 장보고의 활동 무대였다는 사실 정도만 다루고 대륙백제설과 요서경략설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심청처럼 왕건 조상 이야기도 지어낸 설화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시킨 왕건이 황해 해상권을 장악했던 패서 호족 출신이라면 그 조상들의 활동 무대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고려사]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가문의 영광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는 게 참 안타깝다.
 
고려말에 작성된 [편년통록]이라는 역사서에는 왕건이 당나라 황제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 숙종이 황해를 건너 송악에 온 적이 있었는데 어느 집에 잠시 묵을 때 그 집 딸과 동침하여 태어난 아이가 작제건이고 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당나라로 건너가려고 배를 탔는데 중도에 서해 용왕을 만나 도와주고 딸 용녀와 맺어져 낳은 아들이 왕융이며 고려를 세운 왕건은 왕융의 아들이다. 왕건은 당나라 왕족과 서해 용왕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편년통록]의 이 기록은 이후 실증될 수 없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편년통록]은 역사적 사실을 설화로 빗대어 각색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전원철 등의 재야 사학자들은 작제건이 발해를 세운 대조영 집안의 후손일 수 있으며 서해 용왕이 해상왕 장보고와 관련이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시대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과 제나라의 침공으로 외우내환을 겪고 있었으며 산동반도 일대를 지배했던 제나라를 세운 이정기는 발해 유민이니 이 설화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로 치부될 수 만은 없을 듯하다.

 
개성 왕건릉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 왕건 어진
 
 
장보고에 대해서는 우리민족 영웅 해상왕이라고 다들 잘 알고 있는데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의 강국 제나라가 중국 대륙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들 모르고 있다. 발해사가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어 버렸고 조선족의 일파인 튀르크와 여진의 언어가 모두 사라지고 말아 광대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도사관으로 위축되어 버렸다는 게 너무나 통탄스럽다.

왕건 집안이 어떻게 패서 지방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고구려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려를 건국하게 되었는지 후학들이 더 많이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고구려 유민이 세운 산동반도 제나라를 구체적으로 그려낸 지배선의 소설 [제3의 고구려]와 안지용의 소설 [황해]가 이미 나와 있으니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더 나아가 세계 어느 언어보다도 표현력이 뛰어나고 사용 지역이 넓었던 한글 어족에 대한 연구가 감춰진 우리 조선족 역사를 복구해낼 것이라 기대해 본다. 몽골어, 만주어 등 한국어 어족에 속하는 대부분의 북방 민족 언어를 포함해 29개 언어를 습득하고 수많은 사서(史書)를 비교 분석하여 멸실될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사를 복원해낸 전원철 선생의 연구 성과가 너무나 놀랍다.

그는 고려를 세운 왕건의 조상, 동아시아 최대 강국이었던 청나라 금나라 건국 시조 아골타의 조상, 아시아 유럽에 걸쳐 대제국을 이룩한 몽골 제국의 영웅 칭기스칸의 조상이 모두 발해 왕족 ‘금행’의 후손이라는 걸 증명해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건국 시조들의 발원지가 모두 혈구 주변 예성강 유역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지금은 분단 상태라 뱃길이 다 끊겼지만 통일이 되면 혈구 벽란도 영광의 역사가 부활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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