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최고 문벌 인주(인천)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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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최고 문벌 인주(인천) 이씨
  • 이한수
  • 승인 2019.09.24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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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우영수의 [최후의 결전]과 박희철의 [국풍 1135] - 이한수 / 인성여고 교사


 
인천이 고려시대에는 ‘인주’로 불렸다. ‘7대어향(七大御鄕)’으로 최고의 세도가 이허겸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라고 ‘인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허겸은 원래 경주김씨 왕족이었는데 당나라 황제한테서 이 씨 성을 하사받아 인주에 정착하여 이 씨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7대어향’은 일곱 임금의 처가 또는 외가라는 의미로 인주이씨는 근 100년 동안 연달아 왕비를 배출한, 대단한 권세를 누렸던 가문이다. 삼국시대에는 미추홀 또는 매소홀로 불렸는데 고려 때 들어 어진(仁) 왕비를 배출한 경사스러운(慶) 동네라는 의미로 ‘인주(人州)’ 또는 ‘경원(慶源)’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원인재 현재 모습
 
이전하기 전 원인재
 

인주이씨 집안의 유적은 연수구에 그대로 남아있다. ‘경원대로’는 ‘인주’의 또 다른 이름 ‘경원’에서 따온 지명이며 ‘원인재(源仁齋)’는 글자 그대로 ‘인주이씨의 기원(源)이 되는 집(齋)’이라는 뜻이다. 원인재는 원래 인천 연수구 연수동 533번지 현재 주공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비류대로’ 공사할 때 지금의 원인재 자리로 옮겨졌다. 지금의 원인재 자리는 시조 이허겸의 묘가 있던 자리로 원인재 건물을 옮겨 새로 조성된 곳이다. 승기천변으로 옮겨가기 전의 원인재 한옥 건물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고려시대 최고 권세가의 가택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1950년대 항공사진을 보면 문학산과 청량산 사이에 꽤 넓은 들판이 있었으며 지금 남동공단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염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문학산 북쪽이 도호부관사가 들어서면서 인천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문학산 남쪽이 인천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른 들판과 갯벌을 끼고 있어 식량 생산이 풍부하고 포구가 육지 깊숙이 들어와 해상 교통이 편리했던 지리적 요건은 인주이씨의 가문의 물적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좋은 지리적 조건과 신라 왕족과 근친관계라는 혈연 배경이 인주(인천) 이씨 집안을 고려시대 천하제일의 권세를 누리게 했는데 그 화려했던 세도가의 유적이 어찌 이리 초라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이 참으로 궁금하다.

 
1950년 항공사진
 
같은 지점에서 본 현재 모습 (네이버 지도)

 
 
인주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본래 이름은 '허겸'이었다고 한다. 가야국의 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황후로 맞아들여 낳은 자식 중 몇 명에게 허씨 성을 내렸고 허겸은 그 후손이며 당나라 현종에게 공을 세워 이씨 성을 하사받아 인천으로 이주하여 인주 이씨 가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허겸은 안산김씨 김긍필과 사돈 관계를 맺는데 이 집안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과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의 후손으로 고려 건국 초기 최고의 외척 가문이었다. 이허겸이 안산 김씨와 사돈을 맺고 외손녀들이 8대 현종의 왕후가 되면서 인주이씨는 안산김씨와 맞먹는 외척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렇게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었으니 인주이씨 가문은 패서 지방의 왕씨 가문과 함께 고려 건국 초기에 양대 문벌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도 북방에 대국이 탄생해 고려를 위협하면서 그 권세도 위기를 맞이한다.

 
KBS [HD역사스페셜] <천년 전의 역사전쟁-고려거란전쟁 >
 

고려 왕조가 문벌 세도가의 세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울 때 나라 밖 사정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만주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각축을 벌이고 중국 본토에서는 당나라 이후 5대10국 혼란기가 수습되고 송나라가 세워진다. 여진족은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족의 요나라를 친 뒤에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까지 압박하여 만주와 중국 대륙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금나라가 한창 성장할 때 고려와도 일전을 벌였지만 고려의 명장 윤관, 척준경에게 밀려 동북 9성을 빼앗기고 냉전체제가 유지된다. 금나라에서 호걸 아골타가 집권하면서 고려는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금나라는 고려로부터 동북 9성을 되돌려 받게 된다.
 
북방에서 여진족의 금나라가 날로 강성해져 갈 때 고려의 왕권은 실추되어 갔다. 당대 최고의 문벌인 인주 이씨 집안의 이자겸은 최강의 명장 척준경과 힘을 합쳐 왕권을 제압하고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는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이자겸의 왕위 찬탈 모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사대주의에 반발하면서 북벌을 주장하던 묘청은 서경 천도 등 대금(對金) 강경책을 추진하다가 김부식에게 밀려 제거되고 만다. 김부식은 자신이 쓴 삼국사기에서 묘청을 역적으로 평가했지만 후대에 와서 신채호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는 이를 달리 평가했다. 김부식에 의해 묘청의 북방 정책이 좌절되면서 우리 민족사의 판도가 반도 안으로 크게 위축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시대 국내 판도는 정지상 묘청의 서경파와 이자겸 김부식의 동경파가 자주북벌(自主北伐) 대 사대교린(事大交隣)으로 맞섰고 대부분의 역사소설도 그런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고려 중기 문벌귀족시대 사회상을 그린 역사소설로 우영수의 [최후의 결전]과 박희철의 [국풍 1135]가 많이 읽히고 있다. 이 작품으로 우리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현장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당시 이자겸의 인주이씨 집안은 고려가 건국되면서부터 형성된 문벌귀족 중 최강의 문벌 세도가로서 손녀와 딸을 인종 왕후로 들여보내기까지 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딸 둘을 예종, 인종 부자에게 시집을 보냈을까. 인종에게는 왕의 이모가 되는 이를 왕후로 들여보낸 이자겸의 패덕에 대한 비난은 지금도 횡행하다. 소설은 이자겸이 패륜을 저지르면서 권력에 집착하다가 결국 제 자식에게까지 버림을 받는 이자겸의 득세와 종말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다.

 
채널A [천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 162회 딸의 배신으로 이자겸이 체포되는 장면
 

이자겸은 인주이씨 문벌 가문의 권력을 보위할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진족 정벌에 큰 공을 세워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척준경 장군과 결탁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게 되면서 인종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를 꿈까지 꾸게 된다. 이자겸은 딸을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고 하지만 딸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자겸은 딸뿐만 아니라 자신의 오른팔 척준경에게도 배신을 당한다. 인종은 척준경을 끌어들여 둘 사이를 이간질 하고 결국 이자겸은 배신자에 의해 처단되고 만 것이다. 이자겸과 한통속이었던 척준경이 배신함으로써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거사 이후 실권은 척준경이 독차지하게 되고 왕권은 더욱 실추된다. 왕실의 이전투구는 권력에서 소외된 문벌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고 그 중 서경파가 결집하면서 또다시 묘청의 난이 일어난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우리 역사서는 고려 전기 문벌귀족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야합을 하고 패덕도 서슴지 않는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겠지만 집안싸움의 배경이 되었던 국제 정세의 격변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종 때 한반도 주변 정세는 대체로 중원의 송나라와 북방의 여진, 반도의 고려, 삼각 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국내 사정도 마찬가지로 세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자겸이 휘어잡고 있는 왕실과 정지상 묘청으로 대변되는 서경파(평양), 경주 김씨 호족 세력이 주도하고 있는 동경파(경주)로 삼분되어 있었다. 서경파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동이족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으며 고조선과 고구려 때에는 조선족과 부여족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만주 일대의 광대한 강역을 통할했던 고구려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북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자겸이 실권(失權)을 하고 척준경이 잠시 권력을 잡는 듯했으나 그 또한 쫓겨난 뒤로는 서경파와 동경파 양대 세력이 각축을 벌인다. 서경파가 묘청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독점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고려 조정은 동경파 김부식의 손아귀에 들게 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김부식이 기록한 [삼국사기]는 반대파인 묘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테고 후대의 역사인식은 사대주의로 편향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의 모화(慕華)사상과 역사 왜곡으로 우리 역사가 반도사로 위축되었다고 원통해했다. 참 어려운 문제이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외세의 간섭과 극단적 내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인도 아유타국과 통혼할 만큼 개방적이 해양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신라 왕족 김함보의 후예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를 형제국으로 대우했던 신라계 동경파의 교린(交隣) 정책을 단순히 사대주의로 폄훼할 수 있는지? 중국 대륙을 제압할 만큼 강대국으로 성장한 금나라와 전쟁을 불사할 만큼 대적하는 게 민족자존의 유일한 경략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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