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하는 싶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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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는 싶은 사람들
  • 최원영
  • 승인 2019.09.30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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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선과 악이 상존하는 세상에서


 


풍경 #123. “그와 함께 다시 일하고 싶으세요?”
 
누군가의 인품을 확인하고 싶으면 “그 사람과 함께 다시 일하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대답이 많다면 그의 됨됨이는 꽤 괜찮은 사람일 겁니다. 본인을 앞에다 두고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제삼자에게는 자신의 느낌을 솔직히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다시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를 생각해봅니다. 이 질문은 거꾸로 ‘나는 어떤 사람과 함께 다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까?’와도 같은 질문이 될 겁니다. 이렇게 거꾸로 질문해보면 비교적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비난하는 사람보다는 세상을 긍정하는 사람을 더 좋아할 것이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지시하는 사람보다는 실수조차도 미소로 안아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겠지요.
그렇다면 답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셈이 됩니다. 다만 머릿속에서 관념만으로 알고 있느냐, 아니면 실천까지 하고 있느냐가 관건이 되겠지요.
 
『30년만의 휴식』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직장생활을 행복이나 불행으로 이끄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행복한 관계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매사를 수용적, 즉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불안감도 수월하게 안정감으로 바뀌고,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편안해지기 마련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낙관주의자는 장미에서 꽃을 보지만, 비관주의자는 장미에서 가시만 본다”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똑같은 장미를 보고도 낙관주의자는 그 꽃에서 행복감을 느끼지만, 비관주의자는 불행을 느낄 테니까 말입니다. 같은 의미로 토마스 칼라일은 “길을 걷다가 돌을 보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말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한다”고도 했습니다.
 
세상은 선과 악, 이 두 개의 상존하는 세상입니다. 선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다만 ‘선’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감격하고 사는 사람과 ‘악’만을 바라보며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습니다.
젊은 시절 자신에게 나타난 백마를 탄 기사를 ‘완전한’ 남자라고 여기고 결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느끼고는 절망합니다. 이렇게 어떤 존재를 ‘완전하다’고 믿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실망할 일만 눈에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실 누구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겠지요. 장점을 보면 감탄하고, 단점을 보면 실망하고 하는 게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단점마저도 안아주는 그런 사람이 장미에서 꽃을 보는 사람이고, 돌을 디딤돌이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풍경 #124. “그것 참 잘된 일이군!”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라는 책에 소개된 우화 하나를 전해드릴게요.
 
왕과 오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무슨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무조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것 참 잘된 일이군.”
 
어느 날 왕과 사냥을 떠났습니다. 친구가 총에 총알을 장전해 왕에게 내밀었습니다. 왕은 장전된 총을 받아들다가 실수로 방아쇠를 잡아당겨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맞춰 발가락이 잘려나가고 말았습니다. 이때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것 참 잘된 일이군.”
 
화가 난 왕은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왕은 혼자서 사냥을 즐기다가 식인종들이 들끓는 지역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잡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식인종들은 왕의 손발을 묶어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려고 하다가 왕의 엄지발가락이 없는 걸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몸이 온전치 않은 사람을 절대 먹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을 풀어주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살아서 궁으로 돌아온 왕은 그 친구 덕에 살았다고 여기고는 감옥으로 가서 친구에게 말합니다.
“자네 말이 맞았네. 내 엄지발가락이 없어진 것이 아주 잘된 일이었어.”
그러면서 친구를 풀어주며 사과했습니다.
왕의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역시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거 참 잘된 일이군.”
 
왕은 도저히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물었습니다.
“아니, 또 그 소리인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는데 그게 참 잘된 일이라니, 자네는 화가 나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친구는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잘된 일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만약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왕이 식인종들에게 잡히는 순간에 나도 왕 곁에 있었을 것이 아니겠소?”
“그랬겠지.”
“그렇다면 내게는 잘린 발가락이 없으니 그들에게 잡혀 먹이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감옥에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잘된 일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늘 행복한 일만 일어날 수만은 없겠지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행복을 선택하면 그냥 그대로 좋은 겁니다. 삶에 대한 태도는 결국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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