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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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밥
  • 이충하
  • 승인 2019.10.24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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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밥 - 이충하
 


 

깨밥

                        - 이 충 하

 
딸 셋에 아들을 낳으니 금지옥엽이다
낳을 때는 천하를 다 얻은 듯 황후장상도 부럽지 않고
끼니때 걸러도 배고프지 않았는데
태생이 허약하여 시도 때도 없이 감기를 앓고
체열이 오르면 경기까지 일어나 집안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머님 마음 늘 조마조마 놓이지 않고 가슴 저미어
입에서는 소태를 씹는 듯 쓴맛이 가시지 않았다
어머님이 나를 위해 만든 특별요리 깨밥
꼬들꼬들 흰쌀밥에 참깨를 넣어 비빈 사랑
입맛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하면
특별히 만들어 주신 보양식
고소하고 톡톡 씹히는 깨알 맛
밥숟갈 위에 김 한 장 살짝 올려놓으면
없던 입맛도 돌아오고 밥맛이 꿀맛이다
밥 한 사발 마파람에 개 눈 감추듯 하고
언제 감기를 앓았느냐 듯 잘도 뛰어다녔다
꾸리꾸리한 보리밥 물에 말아먹다가
지난번 먹어본 깨밥 생각나
머리 아프다 배가 아프다 입맛 없다 하며
꾀병을 앓고 밥을 안 먹는다
어머님 눈치 채시고
깨밥이다! 어서와 밥 먹어라! 하신다
밥뚜껑 열어보니
쓰디쓴 익모초 달인 물 한 사발……
칠십 고개 넘어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병 없이 몸과 마음 건강한 것은
어머님이 정성으로 만들어주신 깨밥
익모초 달인
그 진한 사랑 덕분이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음식이 있다. 이 시에서의 화자에게는 그것이 깨밥과 익모초이다. 딸 셋에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그 아들을 금지옥엽처럼 키웠다. 태생이 허약한 아들은 어머니가 정성껏 만들어주는 보양식을 먹고 건강하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정서적 밀착은 마음의 원형으로 남아 자라면서 어떤 마음의 허기가 와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지금은 프로야구 시즌 막바지다. 프로야구단의 매니저는 전국 프로 야구장을 누비며 선수들의 식단을 꼼꼼히 챙긴다. 경기 도중에도 바나나와 찐감자나 에너바 같은 음식으로 힘을 보충한다. 이렇게 잘 거두면서 살피는 도탑고 성실한 마음은 그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준다.
 
또한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 이휘호 여사는 이성과 지성을 갖춘 여성이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아내를 넘어서는 정치적 동지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상한 어머니였다. 찾아오는 참모들과 손님들에게 항상 직접 만든 음식과 따뜻한 밥을 내놓았다.

우리는 누구든지 어떤 인연으로 관계를 맺고 산다. 그 관계가 언제까지 순조롭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 몸에 자주 찾아오는 감기처럼 우리 삶은 아무 탈이나 말썽없이 평탄하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돈독했던 관계들은 위태롭게 파도를 타고 관계가 틀어지기도 한다.
 
“소태를 씹는 듯 쓴맛이 가시지 않”게 될 때 괴로움의 저 밑바닥에서 순수한 마음의 원형이 살아난다면? 가령 “꼬들꼬들 흰쌀밥에 참깨를 넣어 비빈 사랑-특별요리 깨밥을 해주신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린다면 ‘없던 입맛’이 돌아올까.
 
“머리 아프다 배가 아프다 입맛 없다”하며 밥을 안 먹어도 눈치 채시고 ”깨밥이다! 어서와 밥 먹어라! 하시는 어머니가, 어머니 같은 존재들이 이 세상 구석구석에 많이 살아 있어서 불협화음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면? 달려와서 밥뚜껑 열어보니 익모초 달인 물 한 사발이 있다면? 있더라도 그 쓰디쓴 사랑을 한 모금씩 나눠 들이킨다면? 분열되어 서로에게 상처만을 주던 관계들이 나아질까? 어머니의 깨밥과 익모초 달인 사랑이 생각나는 시절이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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