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잠든 고려 최고 문인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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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잠든 고려 최고 문인 이규보
  • 이한수
  • 승인 2019.10.2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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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BC 드라마 [무신],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 이한수 / 인성여고 교사



고려시대는 보통 권력 구도에 따라 크게 문벌귀족, 무신, 신흥사대부 집권기 셋으로 시기 구분을 한다. 신라시대에는 왕가의 혈통에 따라 권력 서열이 정해지는 골품제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통일신라 말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그 권위가 허물어지고 지방 호족이 새로운 세력으로 발호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환되어 가던 당시 세계사의 흐름과도 부합된다. 문벌귀족 지배기에는 크게 개경파, 동경(경주)파, 서경(평양)파가 삼분되어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이들 호족 세력이 서로 다투면서 경합하는 동안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무신 집단의 불만이 쌓이게 되고 결국 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무신정권기 최대 권력자는 최충헌, 최우 부자夫子이며 최씨 집안이 4대에 걸쳐 권력을 독점하던 시기가 무신정권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때에 무신정권은 몽고 침입이라는 외환을 겪게 된다. 아홉 차례에 걸친 몽고군의 침략으로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굴복하지 않았으며 이규보는 이 강도江都 시기 고려 조정의 최고 문신이었다.

 
강화도 길상면 이규보 사당과 묘지
 

이규보는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나쁜 평가를 주로 받는데, 민족정기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절개 있는 지식인으로 평가할 만도 하다. 그의 저서 [동명왕편]은 한민족 고대사의 영웅 동명성왕(주몽)의 고구려 건국사를 영광스럽게 노래하여 후대에게 민족 자긍심을 갖도록 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민족정기를 담은 서사시 이외에도 <국선생전>, <이옥설> 등 많은 소설 작품들을 남겨 근대 서사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을 만큼 문학의 귀재이기도 했다. 인천에는 이규보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부평구 백운동은 그의 호 ‘백운거사’에서 따온 지명이며 강화도 길상면에는 그의 묘지가 있다.
 
이규보는 고려 중기 대표적 문인이며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고려 무신정권 격동기 역사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그려낸 사극이 별로 없어 아쉽지만 그는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서 많은 저서를 남겨 그의 삶을 쉽게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이규보(아명 인저仁底)는 어린 시절 총명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어린 애가 어찌나 총명했는지 그의 고향 여주 사람들은 '인저'를 기이한 애기, 기동(奇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잘 지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웬만한 경전은 전부 달달 외울 정도였다. 열 살 정도 된 어린 애가 이런 한시를 지었다는 게 너무 놀랍다.
 

紙路長行毛學士 종이 길에는 모학사가 줄곧 지나가고
盃心常在鞠先生 술잔 속에는 국선생이 늘 들어 있네

 
그 나이에 늘 붓(모학사)을 들고 글쓰기를 즐기고 술(국선생)을 즐겨 마셨다니 너무 조숙했던 게 아닌가.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수차례 떨어진 걸 보면 시험 과목에는 별 관심이 없고 문학에 심취했던 모양이다. 평생 8000여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하니 어릴 적부터 시재(詩才)가 남달랐을 것이라 짐작할 만하다.
 
세 번 내리 과거 시험에 떨어졌다가 네 번째 시험에서는 1등으로 합격했다. 재수, 삼수 내리 떨어졌다가 사수 때 수석 합격이라·····. 기이한 아이, 기동(奇童)이 분명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저’는 ‘규보’로 거듭난다. 네 번째 과거 시험 보러 가는 날 꿈을 꾸었는데 하늘의 별(奎星)이 ‘인저’를 쏘며 '너는 장원 급제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소리를 들었고 실제로 장원 급제를 하자 이름을 아예 '규성이 알려주다'는 뜻의 '규보(奎報)'로 바꿨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과거에 겨우 합격하긴 했지만 관직에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발령이 나지 않아 방 안에 틀어박혀 시를 쓰며 지냈다. 그렇게 보낸 십 년 세월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규보는 명문가 출신이 아니다. 아버지 대에 들어 집안 형편이 좋아졌고 아버지는 아들 이규보를 높은 관직에 앉히려고 어릴 때부터 자식 교육에 공을 들였다. 그 당시 최고의 명문 사학인 [문헌공도]에 입학시켰고 따로 개인 교습도 시켰다. 어린 시절 성장기를 보면 이규보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 부모님의 출세 지향 노력 덕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그를 출세시키려고 공을 들일수록 그는 반발심이 커졌던 모양이다. 열아홉 살 한창 나이에 중국의 죽림7현을 모방해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모임을 만들었고 늘상 술에 취해 살았다. 술에 잔뜩 취해 시험을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술을 의인화하여 ‘국선생전’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으니 그의 술주정을 대충 알만하다. 이런 그의 젊은 시절을 보면 최씨 무신정권 시기에 고려 사회에 대한 청춘들의 저항의식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칠현설’에 문학하는 친구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세상 한탄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신정권 때에는 벼슬자리보다 몇 배나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에 나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규보도 과거에 급제하고 내리 10여 년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이리저리 청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참 불우한 시절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불행은 그를 문인(文人)으로 성장시켰다. 많은 문인들과 어울려 지내며 문학을 논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나누었다. 어울려 지냈던 친구들 중 이인로, 임춘 등 우리 문학사에 유명한 문인들도 껴있었다.
 
이 시기 고려는 금나라의 침략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 문인들이 모여 술과 노래만 탐할 수는 없었다. 나라 사정이 그러니 자연스럽게 민족정기에 대한 의식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금나라의 침략과 농민 반란으로 어수선해진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으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동명왕편>(1193)은 이런 난세에 태어난 작품이다. 고려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정기를 이어받아 세운 나라로 만주 일대는 우리 조상의 강역이었는데 이제 북방 오랑캐 여진족이 차지하고 반도 고려까지 넘보니 기울어가는 국운(國運)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규보가 태어날 무렵 고려는 여진족 지도자 아골타가 만주 일대에 세운 금나라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고려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면서 주종관계는 역전되어 고려가 금의 신하국이 되어 버렸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무신 정권이 들어서고 도처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났으니 그야말로 나라 형편이 엉망이었다. 이규보가 경주에서 일어난 신라 부흥운동(김사미 효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토벌군에 자원해서 나간 것도 고조선 고구려 고려로 계승된 민족정기를 살려야 한다는 그의 민족주의 사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MBC 드라마 [무신]의 이규보
 
 
금나라와 몽고의 침략을 겪으면서 민족정기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으로 영광의 민족사를 서술하는 등 올바른 지식인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의 출세 과정을 들여다보면 석연찮은 부분도 많다. 공부는 잘했지만 출세는 못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 물정을 알게 된 건지 지조가 꺾인 건지 권력에 아부하면서 비로소 환로(宦路 벼슬길)에 들어서게 된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갈고 닦고,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었던 문학적 재능은 그가 출세하는 데 큰 밑천이 되었다. 당대 최고 권력자 최충헌이 자기 별장에 정자를 지은 것을 기념하여 여러 문인을 초청해서 시 창작 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이규보의 시가 단연 돋보였고 이후 최충헌의 환심을 사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그의 나이 40대였다. 그때 그가 쓴 글이 <모정기>이다.

 
정자는 날개가 달린 듯 봉황이 나는 것 같으니 누가 지었겠는가,
우리 진강후(최충헌)의 어짐이로다.
잔치를 배푸는데 술이 샘같이 나오고 잔을 받들어 권하니 객은 천명이로다.
잔 들어 만수무강을 비오니 산천이 변한다 해도 정자는 옮겨지지 않으리라.
 

이렇게 아부하여 출세했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다. 최충헌의 눈에 들어 요직에 나가게 되었지만 최씨 집안의 내분 틈바구니에서 요리조리 줄을 서며 눈치를 보다가 결국 팽 당하고 만다.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귀향 가게 되는 이규보를 꽤 긍정적으로 그렸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 최우와 최향이 서로 권세를 이어받으려고 다툼을 벌이는데 이규보가 최우의 편을 들어 최향을 음해했다가 귀양을 가게 되는데 드라마는 그가 귀양을 가게 된 게 최충헌이 이규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린 것이다. 아무튼 이규보는 줄을 잘 서서 최충헌의 권력이 최우에게 승계되고 난 뒤에는 승승장구하여 최씨 정권의 실세가 된다.

 
계양산 삼림욕장공원 이규보 시비
 
 
이규보는 인천과 인연이 참 많은 사람이다. 말년에 강화도에서 조정 신료의 우두머리로 지낼 만큼 강도江都(수도 강화)시대를 주름잡았지만 일찍이 계양도후부 부사로 임직하기도 했다. 최충헌의 눈에 들어 관직에 나가게 되지만 외직으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쉰둘 때(1219년)에 계양도호부 부사로 부임을 했다. 일 년 정도 계양, 지금의 부평 지역 수령으로 일하면서 인천 지역과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의 호 ‘백운거사’는 부평 바로 옆의 ‘백운’이라는 동네 이름으로 남아있다. 계양산 만일사 절에서 읊은 <계양 망해지>, 이규보가 살던 거처를 소재로 한 <자오당기> 등 인천을 소재로 한 작품이 수십 점 된다.
 
“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것과 같으며, 돛대가 가는 것이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과 같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연하게 마주 대하여, 우뚝한 것, 벗어진 것, 추켜든 것, 엎드린 것, 등척이 나온 것, 상투처럼 솟은 것, 구멍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 일산처럼 머리가 둥근 것 등등이 있다.”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

 
계양산 정상에서 본 인천 앞바다
 

최충헌이 죽고 그의 아들 최우가 집권하면서 이규보는 개경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 이후로 수도 개경에서 중앙 관직 생활을 했다. 그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할 무렵 국제 정세는 격변기를 맞이한다. 그가 계양도호부 부사로 임직한 1219년에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스칸은 서방 원정에 나섰고 고려 조정을 방문했던 몽고 사신이 귀국하면서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었고 결국 몽골은 고려를 침략해 들어온다.
 
몽골이 침입(1231년)하자 조정에서는 강화 천도 문제로 논란이 벌어진다. 이규보는 최씨 무신 정권의 논설가로 강화 천도를 강력 주장하게 되고 천도 이후에 최씨 정권의 실세가 된다. 강도(수도 강화)는 그의 세상이 되었다. 원나라에 보내는 청탁 글이 몽고군 장수 살리타를 감동시켜 철군하게 한 이후 고려 조정은 이규보에게 국서에 관한 일을 전담케 하고 그에게 의지하게 된다. 외교적 위업이라 칭송 받았지만 그가 쓴 문서의 내용을 보면 자존심이 많이 상한다.

 
“만약 귀국에서 우리나라를 어루만져 보존하여 만대에 서로 좋게 지내려면, 이 편협한 땅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이와 같은 일을 덜어 주어, 작은 것을 사랑하고 약한 자를 지탱하여 주는 의리를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해 주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 송살리타관인서(送撒里打官人書) 중 -
 
 
몽골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유린되고 있을 때 이규보는 강도(수도 강화)에서 최우 정권의 실력자로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했다. 하지만 나라의 비참한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수차례 사직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야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줄곧 병마에 시달리다가 일흔넷에 운명하고 강화에 묻힌다. 이규보의 삶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운을 지켜내야 하는 지식인의 사명이 얼마나 험난한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고려 말 격변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이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심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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