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살수록 겨울은 더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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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게 살수록 겨울은 더 춥다"
  • 이혜정
  • 승인 2010.12.31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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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 창간 1주년 기획] '꼬방동네 사람들' ② 계양구 효성동


황 할머니는 빈병을 줍다가 손을 비었다.

1. 중구 북성동 '쪽방촌'
2. 계양구 효성동 '쪽방촌'
3. 동구 만석동 '쪽방촌'

취재 : 이혜정 기자

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4일 오후. 효성동 '꼬방동네' 사람들을 찾아서 발길을 옮긴다. 효성동 신사거리를 지나 우뚝 서 있는 구일빌딩 건너편. 봉호대로를 따라 100m 가량 내려가면 작은 단독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동네는 한산했다. 그 단독주택가 앞에 덩그라니 부동산 간판이 있는 것을 보고, 골목길로 들어갔다.

산동네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미로처럼 얼기설기 얽혀 처음 오는 사람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 길을 따라 30분 가량 걸어 올라가도 '가정집'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골목길 양 옆에선 중소형 공장들이 밀집돼 '쿵쿵 꽝꽝' 기계 소리와 함께 공장 안에 묶여 있던 개들이 낯선 사람 인기척에 짖어댔다.

높은 지대로 올라갈수록 강한 바람은 코끝을 시리게 한다. 손끝과 발끝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저릿저릿하고 얼얼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니, 반듯한 정사각형 집에 여러 세대가 사는 곳이 있었다.

그 중에 첫 번째 집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계세요?"라고 하자 "네?"라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연다.

"누구세요?"라는 황모(88) 할머니 물음에 "저 신문기자예요. 효성동에서 어렵게 사시는 분들 만나러 왔는데요. 할머니 집이 보여서 왔어요."라는 대답에 반갑게 맞아주신다.

"어이구! 할머니 집이 냉방이네요. 춥지 않으세요?" '민망한' 질문.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올 정도다.
 
"우리 집이 좀 춥지? 작년 1월에 보일러가 고장 났어. 돈이 없으니까 고치지도 못하고…. 그저 전기장판 위에 앉아서 전기난로 켜고 있으면 괜찮아."  할머니는 이불이 덮여 있는 전기장판 속으로 들어오란다.

집안 한기를 견디기 위해 할머니는 조끼점퍼 안에 얇은 점퍼와 니트, T셔츠, 내복, 솜바지를 껴입고 있었다. 또 2개의 양말을 겹쳐 신은 채 생활을 하고 있다. 몇 마디 나누는 동안에도 '칼바람'이 들어왔다. 기자 역시 두터운 겉옷에 내복을 입었어도 방 안의 추위를 달래기에는 힘들다.

황 할머니의 집은 방 두칸, 화장실, 거실 겸 부엌으로 돼 있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방 한 칸뿐. 할머니가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방은 물이 새서 천장과 바닥에 곰팡이가 피어 올라 있었다. 금이 간 창문은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테잎으로 막았고, 그 위에는 얇은 커텐을 덮었다.

"할머니!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생활하세요? 저 커텐도 너무 얇아서 바람이 계속 새 나오네요. 저기 창문은 왜 그랬어요?"  "지난 번에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앞에 세워놨던 판자가 창문에 떨어졌어. 바람이라도 막아보려고 테잎으로 막아놓은 거야."


황 할머니는 곰팡이 냄새를 없애려고 방 한 구석에 귤 껍질을 놓았다. 

온 집안에는 곰팡이 냄새가 진동해 머리가 아프다. 곰팡이 냄새를 없애려고 방 한 켠에는 귤 껍질을 모아 '방향제'로 사용한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방안 벽면 곳곳에는 금이 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특히 화장실에는 페인트칠이 벗겨져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고, 물이 나오지 않아 오물냄새가 진동을 한다. 어디서 퍼온 물인지 화장실 안에는 물이 한가득 담긴 대야 8개가 놓여 있다.

황 할머니의 경우 1970년 37살이 되던 해 큰딸이 일하고 있는 인천으로 온 식구들이 이사를 왔다. 인천에 이사를 오기 전 할머니는 강원도에서 남의 옥수수 밭일을 도와주며 푼돈을 모아 7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아이고~ 정말 고생 많이 했어. 남편은 만날 술을 먹고 들어와서 때리고 욕하고…. 어린것들 먹이고는 살아야 하니까 남의 옥수수 밭에서 애들이랑 일하면서 먹고살았지. 그때 큰딸이 인천으로 가 재봉틀공장을 다니면서 일을 했거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식구들 데리고 여기로 온 거야." 

할머니는 이어 "우리 큰딸이 고생 많이 했어. 남편은 허구한날 술만 마셨어. 7남매 먹이려면 나 혼자 일해서는 어림도 없으니까…. 큰딸이 희생 많이 했지. 내가 아직도 그거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라며 한숨을 쉰다.

결국 할머니 남편은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인천에 온 지 4년 만에 죽고, 큰딸과 함께 미싱일과 식모살이 등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할머니가 사고로 다리를 다쳐 걷는 것도 힘들어지면서 큰딸이 집안을 이끌었다. 그 당시 할머니 가족의 수입은 40여만원. 자라는 자식들 굶을까봐 할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게 밥을 굶었다고 한다.

"미우나 고우나 남편인데, 약은 사다 먹여야지. 자라는 애들 밥은 굶길 수 없으니까 쌀을 조금 사다가 고구마와 감자 같은 거 섞어서 먹이고 그랬어. 내가 못 먹어도 애들은 먹여야지."


황 할머니는 '인터뷰'를 끝내자마자 며칠간 모은 폐휴지와 빈병을
늦기 전에 팔아야 한다며 손수레를 끌고 고물상으로 향했다.

할머니 자녀들은 전부 지방에서 어렵게 생활한다. 자식 이야기에 할머니는 눈물을 쏟아냈다.

"사실은 올 초에 우리 큰아들이 여기 와 있었어. 그러다가 올 7월에 간암으로 죽었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누가 지 애비 자식 아니랄까봐…. 아휴~ 죽기 전에 나랑 같이 있겠다고 저 쪽방에 있다가 하늘나라에 갔어."

"이 겨울에 얼마나 춥겠어? 우리 아들 저세상에서 추울까봐 난 추운 것도 모르겠어. 어휴 그만해! 자식들 자랄 때 넉넉하게 해주지도 못해서 한이 많아. 자식들 말하면 뭐해! 욕하는 거 같아서 그만하고 싶어."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황 할머니는 자식 걱정을 하느라 안달이다.

현재 황 할머니는 공공일자리를 맡아 하면서 받는 30만원과 폐휴지를 주워서 버는 하루 7천원~1만원의 돈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할머니는 늦기 전에 며칠 모아둔 폐휴지를 고물상에 팔아야 한다며 '인터뷰'를 그만 하자고 했다. 이날 할머니는 인근 교회에서 나눠주는 밥을 얻으러 간다고 했다.


효성동 '꼬방동네'를 올라가는 길. 재개발 확정으로
많은 주민들이 떠나고 빈집들만 남아 있다. 

또 다른 효성동 '꼬방동네'를 찾아 다시 골목길을 따라 오른다. 길가에는 재개발 표시가 돼 있고,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빈집들만 있어 더욱 썰렁하다.

골목길 끝자락에 닿아 조그마한 사찰을 만났다. 사찰을 끼고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작은 '산동네'가 나온다.

한 꼬마아이가 추운 줄도 모르고 강아지 두 마리와 놀고 있다.

"꼬마야 이 동네 어른들 좀 만나러 왔는데, 여기 사니?"라고 묻자 "저희 집에 할머니 있어요"라며 집으로 이끈다.

그 집에는 김모(81) 할머니와 함께 중학교를 다니는 손자(16), 초등학교 다니는 여자아이(11)가 있었다. 할머니는 바람에 얼굴이 벌개진 기자를 보고, 몸을 녹이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낯선 방문에 할머니는 "아가씨, 이렇게 추운 날 산동네까지 뭐 때문에 왔어?"라고 궁금한 듯 묻는다. 기자가 신분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자,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할머니는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사는게 힘들어 1979년 41세가 되던 해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 당시 지방에서는 "인천에 가면 먹고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인천에 올라와 이곳 효성동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는 집을 얻을 돈이 없어 산밑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할머니가 처음 판잣집을 짓고 살았을 때 이곳에는 할머니 집을 포함해 두 채가 있었다.

"너무 살기 힘들어서 인천에 왔어. 그때 인천에 오면 뭐라도 먹고살 수 있다고 해서 왔지. 처음에는 돈 한 푼 없으니까 집도 못 사고…. 오죽하면 여기 올라와서 살았겠어? 그나마 우리 아저씨가 손재주가 좋아서 이것저것 판자 구해다가 집을 짓고, 두꺼운 천 덮고. 벽돌 올리고 해서 만든 거야."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일용직 노동으로 번 수입으로 간신히 생활을 했다. 그리고 푼돈을 조금씩 모아 집을 보수해 가며 30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18년 전 할아버지가 갑자기 중풍에 걸려 생활이 어려워졌다. 할아버지 병간호 때문에 할머니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할머니 사정을 알고 산 아래 주민들이 쌀이며 김치, 연탄 등을 보내줘 살았다.

"없이 살아도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안 듣고 열심히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그만 중풍에 걸려서 그나마 쥐꼬리만한 수입마저 없어졌으니. 할아버지 병간호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일을 시작했지. 인근 공장에서 일하고, 고물 같은 거 주워다가 팔고, 마늘 까서 팔고, 바느질도 하고, 노가다도 해보고…. 안 해본 거 없이 다하고 살았어."


김 할머니는 곧 다가오는 큰아들 기일에 가슴이 메인다며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중풍에 걸린 지 3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혼자 살게 된 할머니는 큰아들과 함께 살았다. 큰아들은 케이블 전선을 이어주는 일을 했다. 비정규직으로 일거리가 있을 때만 출근한 큰아들. 한 달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밥은 먹고 살 만했다.

큰아들 이야기를 하던 중 할머니의 입술이 떨리더니 말을 멈춘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갔어" 라고 나즈막한 소리로 말한다.

"갔어. 멀리 갔어.우리 큰아들이 지난해 일하다가 전봇대에서 떨어져서 죽었어. 에휴. 사실 요즘 잠을 못 자. 우리 아들이 12월 25일에 죽었거든. 남들은 크리스마스라고 좋다는데, 나한테는 생각하기도 싫은 날이야." 얼마 남지 않은 아들 기일 때문에 더욱 생각이 난다며 할머니는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이렇게 가슴이 아파. 정말 죽을 거 같아.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나 주님 없으면 못 살아. 내가 주님이라도 믿어야 살지. 그거 아니였으면 나 벌써 죽었어." 아들이 죽고 난 후 하루도 빠짐없이 인근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지난해 큰아들이 세상을 뜨고 나니, 혼인 신고 없이 동거생활을 한 중국여성이 밤에 짐을 싸서 떠났다고 한다. 그 후 혼자 남은 할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보다 못한 둘째 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와 지난해부터 함께 산다.

"내가 무슨 복이 이리도 없어서, 남편 보내, 큰 아들 보내, 둘째 아들은 8년 전에 이혼해서 이러고 있고…. 그나마 손주새끼들이 있어 시끌벅적 정신 없으니까 살 만하지…." 


김 할머니 모습.

현재 김 할머니는 한 달 수급비 30만원과 노령연금 8만7천원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따금 작은 아들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벌어오는 돈을 조금씩 준다고 했다.

"다행히 아직 애들이 어려 무상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돈은 많이 안드는데, 앞으로 애들 크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야. 요즘 애들 학원도 다닌다는데. 우리 애들은 그런 것도 못해주니 마음이 편치 않네. 내가 몸이라도 성하면 나가서 일이라도 할텐데, 그것도 힘들어."

할머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이 동네가 재개발구역으로 확정돼 웬만한 이웃들은 보상비를 받고 떠났다. 그러나 할머니는 얼마 되지 않는 보상비를 받고 내려가서는 방 한 칸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대출을 받을 형편도 못 된다. 할머니는 언제 헐릴지 모르지만 되는 날까지 이곳에서 살 생각이라고 했다.

현재 계양구 효성동과 작전동 '쪽방촌' '달동네'에선 이들 할머니처럼 150여 가구 250여 명이 힘들고 어려운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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