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명소 - 송암 박두성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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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명소 - 송암 박두성 생가
  • 김도연
  • 승인 2010.01.3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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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
인천시 중구 율목동 25-2번지에 위치한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한글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누구나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다르다. 시각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인 점자가 아니면 쓰고 읽는 것에 한계가 따른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자 언어가 없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한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 한글 점자를 개발하고 체계화한 인물이 송암 박두성 선생이다.

율목동에는 유명 인사들이 아주 많이 살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존재는 송암이다.
 
송암의 생가는 인천시 중구 율목동 25-2번지. 송암은 1888년 4월 26일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다.

박두성 선생은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송암이 한글 점자를 개발하게 된 것은 1913년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경성제생원 맹아부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으면서부터다.
 
제생원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만나 교육하기 시작한 때부터 일본어점자, 천자문 점역 등을 연구, 1920년 본격적으로 한글점자 창안에 몰입했다.
 
그해 12월 자음 14자를 3점 점자로 옮기는데 성공했으며, 이듬해 모음 10자를 2점 점자로 바꿔 당시까지만 해도 4점형이었던 점자를 한글 3·2점식 점자로 개발했다.
 
그러나 받침(종성)이 없어 혼돈을 거듭하다가 1926년 8월 오랜 노력 끝에 완전한 우리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그해 11월 4일 '훈맹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했다.
 
박두성 선생의 생가는 율목동 주민센터에서 기독병원 방향으로 언덕길을 200여m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주변에 온통 빌라와 상가 건물이 들어서는 사이 오래된 단층 작은 기와집이어서 쉽게 눈에 들어온다. 정문 앞에서 바라보면 ㄱ자를 좌우로 뒤집은 형태의 구조를 갖고 있다. 시멘트 벽면에 기와지붕에선 '세월'이 느껴진다.
 
그가 1963년 8월 25일 생을 마치고 인천 남동구 수산동 묘지에 안장되기 전까지 살던 곳이라고 한다.
 
박두성 선생이 율목동에서 언제까지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17년 결혼 당시에는 서울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1936년 영화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기 직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생가에는 이곳이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임을 알려주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안타깝게도 박두성 선생이 생가는 인천시, 중구청 등에서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시 지정 문화재로도,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도 지정된 게 아니어서 아무런 보호조차 못 받고 있는 형편이다.
 
언덕 꼭대기 율목 어린이공원에는 박두성 생가를 알리는 표지석이 옮겨져 있다. 더욱이 표지석 옆에 설치된 안내 표지판은 닳고 닳아 글씨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방치된 상태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 점자를 창안한 송암의 표지석 안내판인데도 점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얼마 전 인천시의회에서 '송암 박두성 선생 문화업선양회 지원에 관한 조례'가 통과돼 그의 율목동 생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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