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당한 일본사회서 본 '믿음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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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당한 일본사회서 본 '믿음의 가치'
  • 박병상
  • 승인 2011.03.2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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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 칼럼] 박병상 /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지진에 이은 쓰나미와 핵발전소 내 수소 폭발. 일본에서 연일 일어나는 사상 최악의 재해가 언제 진정될지 모르는 가운데, 이웃나라의 어려움을 바라보는 우리는 막연한 위로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방법을 찾고 싶어진다. 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가깝고 먼 나라' 일본. 민족의 뿌리를 도려내려 했던 그들의 침략 역사가 진정한 반성과 화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걸 결코 잊지 않는 우리들이지만, 역사적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 유전자나 언어로 비교하면 가장 가까운 사이의 민족이라는 걸 충분히 안다. 그렇기에 요즘 양국 젊은이들은 어느새 장단점을 서로 이해하며 다독거리는 관계로 성숙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 두 민족에게 상대의 희로애락은 남의 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과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처한 환경이 분명히 다르다. 적어도 4천 년 이상 달랐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그래서 그런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않은 눈앞의 불행 속에서 남 탓 하지 않고 차분하게 사태를 받아들이며 서로 격려하며 내일을 대비하는 일본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선한 감동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만일 우리에게 같은 사고가 발생한다면 일본사회와 같은 모습이 재현될 수 있을까. 아이티공화국에 지진이 벌어졌을 때 약탈에 이은 폭력이 난무했다. 그저 남의 일일까. 1995년 삼풍백화점이 붕괴되고 구조 활동이 한창일 때 좀도둑이 극성이었다. 우리에게 그저 옛날의 일일 뿐일까.

일부 사재기를 하는 이가 없지 않다지만 약탈은커녕 새치기도 없이 남은 물건을 나누려는 심성이 일본 시민사회에 확립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래도 부자든 가난한 자든, 나와 내 식구의 어려움이 사회의 따뜻한 배려로 극복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른바 '보편적 복지'가 뒷받침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려움을 극복할 때까지 정부나 사회에서 적극 지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남의 물건에 손을 댈 이유가 없다. 새치기나 사재기는 불편부당한 지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공동체에서 위험하고 쓸데없는 행동일 뿐이다.

1976년 중국 당산을 뒤흔든 대지진 때 사람들은 누구나 가난해도 이웃이나 상점을 약탈하지 않았다. 당시 개방되기 전인 중국은 지금보다 신속한 복지전달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믿기 어렵지만, 당산 주민들은 나보다 먼저 이웃을 보살폈고 한 톨의 쌀도 나눴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당시 일본 외교관은 감동의 눈물을 적셨다고 경험자는 전한다. '보편적 복지' 체제가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없었지만 서로 믿고 돕던 이웃이기에 아무도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해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 세계 최고의 부자동네인 뉴욕에서 10시간 동안 정전이 발생했을 때, 강도, 상해, 강간이 빈발했던 이비규환과 비교할 수 없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전한다.

아침 10시에 열어 오후 5시까지 문을 닫지 않는 '민들레 국수집'은 밥을 먹으러 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푸는 게 아니라 그들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 국수집은 입 다물고 줄을 서서 들어와 앉아야 하루 한 끼 제공하는 엄격한 복지기관의 밥집이 아니다. 누구든 언제든 찾아와 편안하게 밥을 나누는 쾌적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무도 얻어먹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기 때문이다. 서울 세운상가 한쪽에는 넥타이를 맸든 넝마를 걸쳤든, 무조건 1500원을 받는 국밥집이 있었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그 국밥집 주인은 모자라면 밥이나 국을 얼마든지 얹어주었지만 밥값을 깎아주지도, 더 받지도 않았다. 언제나 공평했기에 찾는 손님은 모두 편안할 수 있었다.

과거 수입과 지위와 행실이 어떠했든, 일정 나이가 든 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제공하는 연금이 사회적으로 만족스럽게 똑같다면 노인 사이에 위화감이나 불안감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의료서비스가 제공된다면 젊은 나이부터 노후대비를 위해 몸과 마음에 맞지 않는 일로 지치거나 병들지 않을 수 있을 터이다. 돈을 더 벌어들이려 아등바등할 일도 없지만, 많은 돈을 남긴 이를 그리 부러워할 일도 없을 것이다. 보편적이기 때문일 텐데, 같은 맥락으로 학교급식을 제공하는 일도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돈이 없는 집의 아이에게 딱지를 붙이고 밥을 주는 복지가 아니라 누구나 똑같은 대우를 받는 보편적 급식이라면 불필요한 갈등이 줄어드는 사회에 신뢰가 더욱 두터워지지 않을까.

여러 경험을 미루어본다면, 복지 앞에 돈은 부차적일 수 있다. 1976년 당산이 그랬을 것이다. 물론 시장이 끌고가는 현대사회에서 돈으로 제공되는 복지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돈보다 위안, 불편부당함, 자신의 일처럼 돕는 이웃이 있는 사회라면 남보다 많은 주머니의 돈은 오히려 불편한 존재일 수 있겠다. 일본인의 호응으로 많은 돈을 번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큰돈을 선뜻 기부하는 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의 일환일지 모른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얼른 달려가고 싶어도 몸이 따를 수 없으니 돈이라도 나누려는 심사일 게다. 중소기업의 희생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대기업이 초과 이윤을 더 나누는 행위도 그럴 것이다. 경영 일선에서 빠져나온 세계적 부자들의 조건 없는 기부는 속죄나 허영심보다 나누려는 심사에서 비롯되어야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세금은 불편부당한 사회를 충분히 지향하는 수준에서 징수되어야 타당할 것이다.

일본의 세금이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지 알지 못한다.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마련된 '보편적 복지'와 그 전달 체계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역시 모른다. 이번 재해를 계기로 보도되는 일련의 화면만으로 섣불리 짐작할 수 없지만, 정부의 조치를 대체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는 일본사회는 시민사회에 정부와 이웃에 대한 믿음이 든든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제공하는 복지와 규제가 보편적이라고 믿기에 가능해진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돌이키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보여주는 질서 있는 일본인의 행동과 이웃에 대한 도움과 배려는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네 고층아파트 숲처럼, 몇 년을 함께 살아도 뜨내기처럼 인사도 없이 지낸다면 돕고 싶어도 돕지 못한다. 얼굴도 모르는 이웃 사이에는 믿음이 생기기 어렵지 않은가.

정부든 개인이든, 돈이 있든 없든, '보편적 복지'는 먼저 신뢰가 바탕이 된 사회라야 뿌리내리기 쉬울 것이다. 낮은 주택이 어깨를 나란히 한 작은 도시에서 불행과 희망을 나누는 일본인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면서, 또한 따뜻한 그들의 사회에 부러움도 느낀다. 그들은 어깨를 부딪치며 낯붉히는 타인들로 북적이는 도시보다 쓰나미에 약했더라도 닥친 불행은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믿음이 바탕이 된 '보편적 복지'는 더욱 단단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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