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소주 한 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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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소주 한 잔 하실래요?"
  • 김주희
  • 승인 2011.03.17 18: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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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남구 숭의2,4동(23)

 취재: 김주희 기자


수봉공원 수봉육교에서 내려다본 숭의 4동 모습.
이 길을 따라 제물포역으로 가다 보면 변전소와 가죽공장, 그리고 와룡소주 양조장
등이 논과 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지난주에 이은 '숭의2, 4동' 이야기는 남부역으로 시작한다.

▲입영열차의 추억을 싣고

40~50대 이상 중년들이 흔히 혼동하는 것이 남부역과 남인천역이다.

남인천역은 수원과 인천을 잇는 협궤열차인 옛 수인선의 인천 종점역으로 1937년 수인선 개통 당시에는 인천항역으로, 후에는 수인역으로 불리던 곳이다. 광역버스 9100번 종점이다.

이 남인천역에서 주안역을 잇는 철도 노선이 또 있는데, 이를 '주인선'이라고 한다.

남부역은 이 주인선의 한 역으로 남구 용현2동 동아아파트를 등지고, 숭의1·3동과 숭의2동에 걸쳐 있다.

역사가 가깝고 발음도 유사한 듯해 사람들은 남부역과 남인천역을 혼동하기 일쑤다. 그래서 남인천역을 수인역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남부역에서 논산훈련소(연무대)를 향하는 입영열차가 운행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1980년대까지 부모와 친구, 애인을 뒤로하고 젊은 청년들이 기차에 오르는 풍경이 남부역에서 펼쳐지고는 했다는데, 40대 후반까지는 이런 기억이 있다.

남부역이 들어서기 전, 한국전쟁 중에는 남인천역에서 학도병들이 열차를 타고 포화 속으로 떠나기도 했다고 한다.

입영열차뿐 아니라 남부역은 군(軍)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남구 숭의1·3동과 숭의2동에 걸쳐 있는 남부역은 주인선 개설과 함께 들어섰다.
주인선은 미군 화물열차가 주로 운행했고, 1980년대는 입영열차가 섰던 곳이기도 하다.

남부역은 주인선이 개설되며 생긴 역이다.

남인천역과 주안역을 잇는 이 주인선은 당시 남인천역 인근에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와 부평미군부대 간 원활한 물자수송을 위한 것이다. 부평미군기지에 집결한 군수물자가 경기북부 지역으로 보급됐으니, 군사목적상 주인선은 중요한 시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물 전용 노선이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1980년대에는 인천과 연무대 사이 입영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주한미군들도 한국에 오거나 본국으로 되돌아갈 때도 이 노선을 이용했다고 한다.

도심을 가로질러 경인선과 합류하는 주인선 3.8㎞구간은 1957년 9월28일 공사에 들어가, 1929년 5월31일 개통된다. 1990년대 들어 부평미군기지 기능이 축소되면서 1992년경 주안~남인천 간 열차운행이 중지된다.

비단 주인선뿐 아니라 이 지역에는 군(軍)과 얽힌 사연이 많다.

6·25 한국전쟁 전후 현 남부역 인근에 미군기지 혹은 다른 군사시설이 있었다. 앞서 소규모 영국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전해오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중구 신흥동 현 삼익아파트 인근에 UN군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포로들이 숭의동 등지에서 노역을 했다는 기억도 토박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바 있다.

UN군이 포로에게 항공기로 보급품을 투하했다가 수용소 밖으로 떨어져 인근 주민들이 주워갔다는 기억도 있다.

어찌됐든 이 노선의 운행이 중단된 뒤 자연스럽게 주인선은 폐선됐다.

철도를 따라 주택가가 줄지어 들어서, 한때는 흉물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기도 했지만 도심 속 낯선 풍경을 자아내 정겹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인천시가 1997년 주인선 폐선 구간에 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철로와 침목을 모두 걷어낸 자리에 흙을 깔고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아 1.4㎞ 구간이 산책로이자 아이들의 등하굣길로 됐다. 2005년 일이다.

주인선은 그렇게 폐선됐지만 남부역에서 남인천역을 통해 인천항 내 축항선과 이어진 노선은 여전히 화물노선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능안삼거리에서 승용차가 이 노선을 지나는 화물열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종종 펼쳐지곤 한다.


인천시는 폐선된 주인선 자리에 공원을 조성했다.
지역 주민들의 산책로로 쓰이고 있으나, 무작정 철거한 철길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아쉬운 것은 주인선 철도를 활용할 계획 없이 무작정 철로를 걷어내는데 그쳤듯, 주인선과 연결된 축항선도 앞으로 같은 처지에 놓일 운명이라는 점이다.

국토해양부는 내항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인천항 100년 역사를 함께한 축항선을 무작정 걷어내려고 한다.

활용만 잘하면 인천항 내부 교통망이자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데도 8천억에 달하는 돈을 들여 새로운 것만 세울 줄 알았지 남은 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없어 보인다.

입영열차의 추억과 전쟁의 고통을 담았던 주인선의 흔적이 없어지고 수인선 복선 전철 공사로 소래역사가 소리 없이 사라져 뒤늦게 아쉬워하듯, 인천세관창고나 축항선 등 인천항의 역사를 담은 유산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와룡소주 한 잔 하실래요?

남부역에서 주인공원을 따라 난 1.4㎞를 지나다 보면 그 끝자락이 경인선 제물포역에 닿는다.

이 제물포역에서 수봉로를 따라 수봉공원으로 가는 길목, 숭의초교 앞 제물포시장 부근에 '와룡소주'를 만들던 양조장이 있었다.

분명 인천에서 난 소주인데, 60대 술꾼들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 맛을 봤다는 이를 찾기가 어려운 이 와룡소주는 대체 어떤 술이었을까.

우선 개항기 인천 술 이야기 하나를 끄집어내 본다.

당시 인천에는 지금의 주식거래소인 미두취인소가 있었고, 축항 등 큰 공사가 많아 외지인들이 몰렸던 터라 덩달아 술 소비가 꽤 됐다.

그러니 술 만드는 양조장도 많았을 터. 한국인 양조장이 14개였고 일본인 양조장이 7개 등 모두 21개나 됐다.

그 많던 양조업계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인물이 최승우(崔承宇)였다. 동산중·고 설립자인 그는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이 학교의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를 세울 때 자기 땅을 내놓았다.

객주업도 했고 대부업체인 인천흥업주식회사도 이끌었던 최승우는 지금은 막걸리라 하는 탁주를 독특한 기법으로 걸러내 일본식 청주처럼 맑은 술(약주)로 만들어 병에 담아 팔아 성공했다.

어떤 연유인지 파악은 안 되나 약주 만든 일을 접은 최승우는 일본인 소유의 조일(朝日)양조장(현 중구 선화동에 공장이 남은 것으로 남한 최초의 소주공장이다)에서 기계식으로 소주를 생산하자, '대동'이란 상표로 소주를 생산해 재미를 보았다.

최승우가 동구 옛 동부경찰서 인근에서 운영하던 소주공장은 해방 즈음 문을 닫았다.


숭의4동 숭의초등학교 후문가 주택가 모습이다.

그렇게 많았던 인천 술은 시간이 흐르며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막걸리 '소성주'와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몇 브랜드가 전부다.

와룡소주는 그 사이에 단절된 역사를 이어주는 인천 술로 볼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현 중구에 1920년 설립된 '와룡주조'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과 '와룡소주'가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참 시간이 지나 1967년 5월 경향신문 등에 와룡소주에 관한 짤막한 기사 2~3건이 포착됐다.

주세 포탈 혐의로 와룡소주 대표이사가 입건됐다거나, 이와 관련해 남구 숭의동이 아닌 중구 신흥동 와룡소주 공장에서 소주 1천병이 압수됐다는 내용이다.

지금 주로 찾는 소주는 예전에 부르던 2홉 병에 담긴 것이다. 얼마 전까지도 4홉 소주나 한 되(10홉)병 소주가 있었고, 오히려 2홉보다 4홉이 더 인기가 있었다.

와룡소주 대표이사가 이 한 되 소주병에 2홉짜리 주세필증을 붙여 팔다가 적발됐다는 기사였다. 2홉짜리 주세필증은 2원14전이었던데 비해 한 되는 8원94전이었다고 전해진다.

1964년 5월16일자 경향신문에는 "도화동 와룡양조장 저수지에서 15세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단신이 실렸다. 기사는 숭의동을 도화동으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저수지 옆에 '와룡양조주식회사'(또는 와룡양조장)라고 새긴 높다란 굴뚝이 바로 '와룡소주' 공장이었다. 저수지는 술 제조과정에서 나온 폐수를 모으는 데 쓴 용도로 보인다.

저수지 주변에서 놀던 토박이들은 '와룡'이라 부르기보다는 그냥 양조장 또는 양조장저수지로 이 공장을 불렀다고 했다.

인천기계공고 학생들이 양조장 공장과 저수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수봉산을 넘어 등교했다. 그 길을 따라 맑은 물이 흘렀고, 그 물이 소주의 원료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수봉산의 지명과도 얽힌 이 물길은 하나 지금 그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와룡양조장 주변은 모두 논밭이거나 배밭, 포도밭 같은 과수원 등이었다.

인근에 변전소(현 숭의초교 앞)가 있었고, 논·밭에 뿌릴 거름으로 쓰려고 인분을 모아둔 '똥통' 서너 개가 있었다고 한다.

'공해공장'으로 눈총을 받던 가죽공장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960년대 고아원인 성애원(현 용정초 부근)에서 현 제물포역쪽으로 촬영된 사진.(사진=blog.daum.net/dbyok) 
사진 중앙 흰색 건물이 옛 선인재단의 전신인 성광학교이고, 오른쪽 굴뚝 있는 시설이 와룡소주 양조장이다.

양조장을 지날 때면 고구마 삶듯 달달한 냄새가 났지만, 공장에서는 겨울에도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며 검붉은 폐수를 내뿜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와룡소주 양조장에 관한 토박이들의 기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역시 설립연도는 정확히 기억하는 이가 없었지만, 대략 1960년대 말까지 와룡소주양조장이 운영된 것으로 전해온다.

당시 인천에 유통된 소주는 진로와 삼학, 와룡 등 3개 브랜드가 있었고, 와룡은 그 중 가장 인기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강원도까지 유통돼 와룡을 기억하는 이도 더러 있다.

지금은 20도 이하 순한 소주가 대세지만, 당시만 해도 30도를 넘는 게 보통이었다. 와룡은 그 중에서도 좀 더 독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진로와 삼학 등은 2홉이나 4홉짜리를 주로 팔았는데, 와룡은 경쟁 소주보다 저렴한 가격의 한 되짜리가 주생산품이었다고 했다.

늙은 술꾼들이 객기 많았던 젊은이 시절, 와룡소주를 사 수봉산에 올라 됫병 채로 들이켰다고 하는 무용담(?)은 시간이 흐른 지금 술자리의 좋은 안주거리로 남는다.

그런데 그 맛은 진짜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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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씨발 2014-12-10 19:00:51
야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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