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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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대여업
  • 김정희
  • 승인 2011.03.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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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김정희 / 시인


영화 <영혼을 빌려드립니다>의 한 장면

일본에서는 ‘인간 대여업’이라는 업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돈을 받고 누군가의 결혼식장에 가서 하객이 되거나 신랑 혹은 신부의 친구가 되기도 하며, 어느 아이의 삼촌이 되어 학교 체육대회에 참석해 아이의 활동상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으면서 응원해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 사고를 일으킨 아이의 부모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거나 선보러 나선 사람의 부모 노릇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배우자로 누구에게 소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본 신문에서는 이런 가짜들의 증가현상에 대해 ‘일본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개인적·직업적 문제를 남들 앞에 보여주기를 꺼려하는 일본인들의 고질적인 문화적 반감이 맞물린 결과’라고 평가했다. 

아무리 일본인들의 문화나 정서가 그렇더라도 이는 제 식구 감싸안기처럼 지나치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린 해석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어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식의 고용-피고용 행위는 작업 현장에 노동 인력을 대여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허위의 삶을 창조하는 누군가의 행위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므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인간 대여’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스웨덴 말뫼라는 도시의 한 도서관에서는 실제로 “인간을 빌려드립니다”라는 행사를 기획했다.

어떤 인간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쌓으려면 그를 대면하여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들어 도서관에서는 평소에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들 아홉 부류를 선정했다. 그리고 신청자에게 45분간 대여해주는 방식이다.

대여 대상에 속한 동성애자, 집시, 노숙자, 전과자, 이맘(이슬람 지도자), 동물보호 활동가 등에게는 수고비가 지급되었는데, 사람들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넓은 시야를 갖게 하기 위한 이 새로운 시도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황금만능주의를 기본 틀로 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돈으로 살 수 없었던 것까지 돈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버리고, 세상 만물을 상품으로 여기며 상품화하도록 부추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일본에서 성행하는 인간 대여업의 창안자는 자본주의 원리는 물론 현대인의 속물적인 욕망을 간파한 사람이라 하겠다. 

그런데 인간 대여업은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신직종은 아니다. 옛날 영국 왕실에는 전문적으로 매를 맞기 위해 고용된 플릭맨이 있었고, 우리나라 전통 생활문화 속에도 여러 형태의 인간 대여 행위가 있어 왔다. 작물의 소출을 많이 얻기 위한 방편으로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하는 시기에는 품을 비싸게 주고서라도 다산부(多産婦)를 대여했고, 흥부전에는 삼십 냥을 받고 남의 매를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가 등장한다.

이 외에도 자식이 없는 집에서는 돈을 받고 아이를 낳아주는 씨받이 부인, 즉 대여 아내를 들여 자식을 낳았는데, 이는 현재 국제적 산업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대리모제도(돈 받고 자궁을 대여하는)로 변모했다. 
 
현대사회는 물질 일변도로 치우쳐 흐르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의 삶의 지향점이나 가치관, 삶을 영위하는 방식, 세계관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참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게 되었고 대다수의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따르며 떠받친다. 또한 타자들의 시선에 얽매인 나머지 있는 그대로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을 과대포장하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성숙한 사람에게는 가짜 삼촌이나 가짜 부모, 가짜 배우자, 가짜 친구, 가짜 하객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인간의 내면을 중시하지 않고 외양만을 추구하려는 속성은 진실과 멀어지는 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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