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나는 하늘 아래 책 읽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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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나는 하늘 아래 책 읽던 마을
  • 김주희
  • 승인 2011.03.31 1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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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남구 용현2,3동(24)

취재: 김주희 기자


수봉산 자락에서 내려다 본 용현 2동과 3동 전경.

인천시사에 나타난 남구 용현동 지명의 유래는 용(龍)과 고개(峴, 岡), 바다 등과 얽혀 있다.

아주 먼 옛날 장마 때 인천 앞바다에서 용(龍)이 한 마리 날아(飛) 하늘로 오르는 걸 보았다는 곳이 지금의 용현동(龍現洞)이라는 것이다.

이를 한자로 '비룡리'(飛龍里)라 했지만, 잘못 전해져 '비랑이' 또는 '비랭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매립이 진행돼 지금은 남구가 바닷가를 낀 지역이란 게 실감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초기 문신 심언광(沈彦光)의 시구 "(인천의) 비룡강(飛龍岡-향토학자들은 이를 비랭이 고개로 해석하기도 한다)에서도 바다가 잘 보인다"에 등장한다는 것 등이다.

이밖에도 '비랑이'를 '파도(浪)가 나는(飛) 곳'으로, '비랭이'는 여러 지명 유래에서 유추해 바닷가에 서 있는 고개로 보기도 한다.

용현동의 지명 유래가 이러하다면, 지금처럼 한자로 '龍現洞'이 아닌 고개를 뜻하는 '峴' 자를 써 '龍峴洞'이라 했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독정이'는 '독 짓는 곳이 많다'는 뜻이 아닌 '책을 읽던 정자'가 있었다는 의미다.
사진은 독정이 삼거리로, 왼편이 남구청 가는 길이고 위쪽이 주안 방면, 아래쪽이 용현사거리 방면이다.

용현동은 1906년 인천부가 비랭이 마을을 비룡리와 독정리(讀亭里)로 나누었던 것을 다시 합쳐 용정리(龍亭里)로 했다가 해방 뒤 다시 바꿔 붙인 이름이다.

비룡리의 유래는 앞서 살핀대로이다.

그렇다면 '독정리'라 하는 지명은 무엇을 뜻할까.

용현사거리에서 주안 방면인 용일사거리로 향하다 보면 가파르고 굽은 언덕이 나오는데, 이를 '독쟁이 고개'라고 한다.

지금껏 이 독쟁이에 대해 주로 '옛날 이 주변에 장독을 만들던 곳이 많이 모여 있었다'는 데서 유래를 찾았다.

이를 최근에 '讀亭里'라는 한자풀이대로 책을 읽는 정자가 서 있던 곳으로 바로 잡아가고 있다. 새도로명 주소 체계에서도 '독정이로'나 '독정이삼거리'라 하듯, 입에 붙은 '독쟁이'란 말 대신 '독정이'로 표기한다.

이 '책을 읽던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지기는 하나, 언제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었는지에 대해선 밝혀진 바 없다.

'독 짓는 곳'으로 독쟁이란 지명도 다른 지역에서는 '독골'이나, '독곡', '독점', '독점골' 등의 형태를 갖고 있어, '독쟁이'(또는 독정이) 풀이를 '책을 읽는 정자'로 하는 게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용현시장은 현대화 사업으로 깔끔해진데다 장사도 제법 돼
재래시장 중 손가락 안에 드는 '대박시장'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독정이 삼거리에서 독정이로를 따라 남구청으로 향해 가는 초입, 수봉산 정상을 바라보고 서 있는 1963년 개장한 50년 전통의 용현시장 진입로가 나타난다.

흔히 독정이로 쪽 진입로를 뒷문으로 알고 있지만, 지역 토박이들은 그 반대로 기억하고 있다. 시장이 언덕 위에서 형성돼 시간이 지나며 아래쪽으로 장사치들이 들어섰다고 했다. 하나 지금은 엄연히 미추로쪽에 난 진입로를 정문으로 하고 있다.

초기 시장이 형성될 때만 해도 주변이 온통 밭이고 논이어서 두렁을 따라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고 하고,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한일극장'이 들어선 뒤 조그맣던 시장이 커지고 활성화했다고도 전한다.

논과 밭에는 상점이 들어서고 신작로가 깔려 하루 종일 번잡한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 됐다.

이 용현시장은 독정이로와 미추로를 사이에 두고 난, 400m에 달하는 용삼길을 따라 200여개 점포가 줄지어 들어선 것이 여느 시장과 다르다면 다른 부분이다.

대부분 시장이 광장 형태로 형성됐거나, 대로를 중심으로 갈래갈래 샛길을 따라 점포가 퍼져 있는 것과 달라, 용현시장은 용삼길을 따라 오르거나 내려가면서 시장바구니를 채우면 그만이다. 순대나 튀김, 풀빵으로 군것질을 하며 쉬엄쉬엄 장보기를 하면 된다.

2005년 7월 현대화 작업을 마쳤고, 지난해 4월에는 주차장 시설도 확보했다. 2009년 중소기업청 표창 등 수차례 수상 경력이 있는 용현시장은 재래시장 중 활성화가 잘 된 '대박시장'으로 꼽힌다.

 


동네주민들이 편하게 '유리부대'라 했던 군부대는 이제 폐쇄돼 을씨년스런 풍경으로 남았다.

독정이삼거리에서 인주대로를 따라 언덕 아래로 용현사거리로 향하다 보면, 좌측에 주유소와 보훈회관을 사이에 두고 높은 벽으로 둘러친 넓은 부지가 나온다.

얼마 전까지 군부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철회됐지만 남구청사의 이전 후보지였다.

군 보급품 중 유류를 보관하던 곳이었는데도 동네 주민들은 '유리부대'라고 불렀다고 했다. '유류부대'인 것을 발음하기 편하게 그렇게 불렀다는데, 지금은 굳게 닫혀 봄기운에도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지도에 '비룡공원'으로 표기된 이 군부대 주변은 오래됐지만 제법 깔끔한 주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일부는 빌라가 들어섰지만,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있는 단독주택이 제법 남아 있다. 1970년대 건설업자들이 표준 설계도로 지어 하나같이 집모양이 같아 '집장사집'으로 불렀던 주택가도 있고, 최근에 지어 앞마당까지 낀 제법 모양새가 나는 집들도 다수 있다.

지역 주민들은 이 지역을 '사택입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주로 살아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해방 직후, 이들 일본인이 쫓겨나고 조선사람이 싸게 주택을 사들여 허물고 새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했다.

이 지역 일본인들이 당시 인천에서 가장 먼저 쫓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있는 집 사람도 있었지만 없이 사는 이들도 많아, 떠날 때 울고불고하는 일본인들을 보며 오히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들 했다.

 


능해길을 따라서 난 옛 수인선 철길은 남구가 정비해 용마루 공원으로 조성했다.
높이 선 솟대의 바람과 달리 철길 주변에는 아직도 낡고 허름한 집이 남아 있다.

남부역 오른쪽에 위치한 용현2동 488번지 일대. 새주소체계로는 웃메길 84번길 주변을 '영단(營團)주택'이라고 부른다.

영단주택이란 일제강점기 말엽,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문제를 해결하려고 지은 공영주택을 말한다. 1941년 설립된,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인 '조선주택영단'이 건설했다.

재능대 손장원 교수는 이 조선주택영단이 공공적 측면에서 주택공급 정책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주로 중류 이하 봉급생활자들과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행태가 보인다.

영단주택은 그 규모에 따라 5개 형태로 나뉘는데, 특갑형과 갑형은 큰 규모의 주택으로 일본 관리나 사원들에게 분양됐다. 다음 규모인 을형은 일본인과 조선인, 그리고 병·정·무형은 한국인 노무자를 대상으로 했다.

인천에서는 부평구 산곡동 87번지와 남구 숭의동 184번지·348번지·147번지, 그리고 용현동 488번지가 사업대상지였다.

이 중 용현동 488번지 일대는 1943년에 조성됐다. 총 98가구가 들어섰는데, 집의 크기는 10평(연면적 33.05㎡나 26.5㎡) 이하 규모다. 집이 협소해 집주인들이 살다가 도로나 마당까지 증축하기도 해서 지금은 예전 그대로 모습은 아니다.

그래도 전체적인 주택단지의 모습은 고단했던 서민의 삶을 그대로 닮았다.

이 주변도 주거환경정비사업이 예정돼 있다.


남부역 초입에서 철길은 왼쪽으로 주인선, 오른쪽으로 수인선으로 나뉜다.
이 남부역 끝에 9~10평짜리 협소한 '영단주택' 단지가 있다.

용현2동은 남부역에서 한 갈래로 난 수인선 탓에 둘로 나뉜다. 앞서 쓴 용단주택 등 북쪽은 재개발 사업을 기다리는, 수인선 철로를 따라 여전히 판잣집 형태를 벗지 못하는 낡은 집이 여전하다. 반면 반대편은 정비 사업을 끝내고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대조적이다.

수인선 북측 마을 쪽에는 분진 피해를 우려하며 화물선 통과를 반대하는 플래카드와 주거환경정비사업에 따른 보상이 더딘데 항의하는 플래카드가 혼재돼 있어 씁쓸함을 더했다.

능해길과 어깨를 마주하고 난 이 구간의 수인선은 '수인선 복선터널'로 새롭게 태어난다.

남구는 옛 수인선 철길이 그대로 보존된 몇 안 되는 이 구간을 그대로 살려 '용마루 공원'으로 새롭게 조성했다. 일부 구간은 침목만 걷어내 걷기 편하게 한 곳도 있고, 솟대와 침목을 세워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옛 수인선을 따라 용현역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성원상떼빌 아파트 끝자락에서 경인고속국도와 마주하게 된다.

인하대병원사거리를 시점으로 해 서울시 양천구 신월동을 종점으로 하는 경인고속국도는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다.

인천과 서울 사이 급증하는 수송수요에 대비해 1967년 3월24일 착공해 1969년 4월12일 고속버스 20대가 처음으로 운행했다.


인천에서 서울과 수원 등지를 이어주던 버스터미널이 있던 곳에
자동차 관련 사업장과 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경인고속국도는 너비 20.4m, 왕복 6~8차선으로 총 길이는 23.9㎞다. 인천시 구간이 17.59㎞로 가장 길고, 경기도는 5.8㎞, 서울은 0.5㎞다.

1968년 12월21일까지 서울~가좌나들목 구간 23.4㎞, 왕복 4차선으로 개통됐고, 1969년 7월21일 가좌에서 인하대병원사거리까지 6㎞구간이 개통됐다.

1993년과 1999년 각각 부평~서인천 구간을 8차로, 서인천~인천 구간을 6차로로 확장했다.

1971년 8월31일 노선명을 서울-인천간고속도로 지정했고, 2002년 5월1일 새로운 고속도로 노선번호 체계에 따라 고속국도 제2호에서 제120호로 바뀌었다.

경인고속국도가 개통됨에 따라 경인국도를 이용해 1시간 이상 걸리던 인천~서울 간 운행 시간이 18분으로 대폭 줄었고, 1974년 5월 인천항 선거 공사가 끝나자 그 기능이 한층 강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도로는 서울외곽순환도로와 연결돼 있고, 39번 국도와 남부순환로를 이어준다. 인천 시점 인근에는 제2경인고속도가 있는, 수도권 교통망의 한 축이다.

하나 경인고속국도는 시간이 갈수록 제 노릇을 잃어갔다. 승용차가 늘면서 정체구간이 길어지고, 흐름이 끊겨 일반도로나 마찬가지다.

한국도로공사가 정기적으로 하는 교통량조사에서 2006년까지도 서비스 수준이 B등급이었던 경인고속국도 시점~도화나들목 구간은 2007년부터 'C'등급으로 내려앉았다. 다른 구간은 변동 없이 D등급을 계속 유지했고, 가좌~서인천 구간은 최저점인 F등급이었다.

더군다나 경인고속국도 건설에 들어간 투자비를 200%이상 회수한 상황이다.

한나라당 이윤성 국회의원에 따르면 경인고속국도에 투입된 투자비는 총 2,613억 원이며, 한국도로공사는 2009년 12월말 기준 통행료로 5,456억 원을 벌어들였다. 투자비를 회수하고도 2,843억 원을 초과해 번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역에서는 통행료 폐지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2004년에는 800원으로 통행료가 인하됐다.

지역에서 통행료 폐지 요구는 지속되고 있으나, 국토해양부와 한국도로공사는 도로간 연계성과 장래 도로건설비용 충당 등을 고려할 때 개별노선에 대한 통행료 폐지나 더 이상의 감면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경인고속국도를 둘러싼 고민은 통행료뿐 아니다.

인천시가 경제자유구역인 청라지구 개발 효과를 높이고, 상습 정체를 해소하려고 추진하는 직선화 사업도 7년간 진척이 없다.

경인고속국도 가좌 나들목에서 청라지구를 이어 제3연륙교로 향하는 직선화 사업은 5천억 원 이상 투입되는 대형 토목공사다. 2014년까지가 목표다.

국비와 시비를 절반씩 들이는 '매칭사업'인데, 시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니 국비 지원도 불투명하다.

2010년 12월말 현재 2공구 16%, 3공구 19%, 4공구 52% 가량 공정률을 보이고 있으나, 1공구는 착공하지 못했다.

덩달아 가정오거리 개발 사업인 루원시티 사업도 차질을 빚고 있다.

2003년 시작된 경인고속도로 직선화 사업은 7년이 지난 지금도 제자리를 걷고 있다.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국도.
남구 용현동에서 시작한 이 도로는 남구를 가로질러 서구와 부평을 거쳐 서울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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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댕이 2011-03-25 09:23:16
우리 동네 얘기라 더 정감이 가네요. 독정이 명칭에 대해 이번에 새로 알게 되어 더 즐겁습니다. 책읽는 정자가 많은 동네라는 사실을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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