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가진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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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가진다는 것의 의미
  • 조영옥
  • 승인 2019.12.05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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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아버지 - 조영옥

 

아버지

                           조영옥

 

 

적산가옥 이층집에서

외조부모와 팔남매 열 두식구가 북적이며 살았다

일본식 안 마당에는 커다란 전나무 두 구루 있고

긴 복도로 이어진 욕실에는 뜨거운 김이 올라오던

커다란 나무목욕통도 있었다

 

활자가 가득 쌓인 사무실에서

조판을 짜고 인쇄기계를 돌리던 아버지

구부정한 어깨로 나무틀에 도장을 끼워 넣고

뾰족한 칼로 누군가의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나는 상아도장이 비싼 줄도 모르고

친구에게 갖다 주고 혼이 나기도 했다

 

다다미가 깔린 넓은 사무실 한 쪽에

아버지는 부풀어 오른 배가 힘이 들어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책을 보았다

아버지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며 마작 판이 벌어지면

뻥 이야큰 소리를 낸 아저씨가

건빵 같이 생긴 마작 돌을 드르륵 긁어모아

다시 벽돌처럼 쌓는 것을 보았다

뻥이야소리가 재미나서 고개를 기웃거리면

지전인지, 엽전인지를 쥐어 주는 맛에 옆에서 빙빙 맴 돌았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신작로 바닥에다

하얀 돌 붓으로 식구들 이름을 쓰고 온 동네를 돌아다닐 때

아버지는 연필과 공책을 주시며 머리를 쓰다듬고 빙긋 웃으셨다

얼굴이 검어져서 그런지, 이만 하얗게 눈부셨다

머리는 멋진 곱슬머리였지만

아버지의 배가 산 같이 불러오고 발등이 수북이 부었을 때

손으로 꾹 누르면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았다

 

육이오 전쟁 때 고향인 충청도로 피난을 간 아버지

깊은 밤이 되면 바닥 빨갱이들이 죽창을 쳐들고 와서

여러 번 끌고 갔다고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끌려 나간 아버지는

아침이 되어야 허깨비가 되어 돌아왔다고

그 때 놀란 것이 병이 돼 간경화가 된 것이라고

그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바람이 몹시 불고 추운 날,

아버지는 몸에 부기가 빠지면서 가벼운 몸이 되었다

갈 길을 준비하는 죽음의 신호인 줄도 모르고,

어린 우리들은 병이 나은 줄 알았다

 

여러 사람 모여들어 장례를 치를 때

제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달라고 남동생이 떼를 썼다

엄마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옆 사람들이 코를 훌쩍였다

 

 

조영옥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단어인 금지권위와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프로이드가 분석한 초자아로서의 아버지나 라캉의 대타자로서의 아버지와 그 주체의 기원이 다르게 드러난다.

 

시인은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이 시를 쓰고 있다. ‘전나무 두 그루’, ‘커다란 나무 목욕통이 있는 적산가옥 이층집이 그려지고 조판을 짜고 인쇄기계를 돌리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다다미라든가 마작판’, ‘피란’, ‘바닥 빨갱이라는 어휘에서 미루어 그 시대적 배경은 해방이 되고 한국 전쟁이 끝난 50년대 전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인쇄기계를 돌리는 아버지, 친구와 마작을 즐기시는 아버지, 시인에게 문고용품을 사주면서 특별히 애정을 표현하는 아버지를 추억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생애 최초의 기억이다. 그 이후의 기억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아있지 않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동생이 차려놓은 음식을 달라고 떼를 썼던 일, 엄마 눈가에 고이는 눈물, 그것을 보면서 훌쩍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인이 담고 있는 아버지에 관한 기억 전부이다.

 

어제는 TV 세계테마기행에서 매를 길들여 늑대 사냥을 하는 몽골 처녀를 보았다. 그녀의 볼은 몽골 대초원의 바람과 맞서 붉게 물들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드넓은 들판으로 매사냥을 나가는 모습에서 원초적인 야생미가 느껴졌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매를 길들이는 법, 사냥을 하는 법, 이동하는 법 등을 배우면서 전적으로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돈독한 부녀 상을 보여 주었다.

 

한편, 같은 날 다른 채널에서 보좌관 시즌2라는 드라마 방송을 보았다. 거기서는 딸의 공천권을 얻기 위해 장관의 비자금 세탁에 공조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최근에는 아버지가 자녀 양육에 참여하는 등 아버지의 역할 수행이 달라지고 있지만 이렇게 욕망의 출발점으로서 아버지가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해야 한다는 그 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인 것이다. 이러한 대타자는 우리 욕망이 사회가 공인하는 가치 체계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딸은 불법적인 아버지에 대항하지만 은행장인 아버지는 자신의 권위가 있었기에 그 명성으로 딸이 의원이 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자녀의 무의식에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보다 ’, ‘명성’ ‘사회적 지위등 물적 지원이나 자신의 후광에 무게를 둔 아버지의 기능만을 말하는 것이 된다.

 

몽골 처녀의 모습에서 생의 탄력감을 느끼는 것은 금지와 권위라는 아버지의 위상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딸의 주체 의식에 생기를 나눠 주고 있기 때문으로 보였다. 조영옥 시인의 시에서 아버지의 부재가 결코 마음의 결핍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역시 시인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부녀의 돈독한 사랑 때문이리라.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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