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묘 앞 은행나무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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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묘 앞 은행나무 아름다워...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9.12.1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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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묘 앞 소재
방학동 은행나무 가을철 풍경
방학동 은행나무 가을철 풍경

방학동 은행나무는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여 많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명성 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여주로 떠날 때 치성을 준 나무라고 전해지기도 하며, 경복궁 증축 당시 징목 대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흥선 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감 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전해지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에도 불이 나서 소방차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수나무인데 나무의 5m 정도에 나무줄기가 옆으로 살짝 뻗어 위로 올라간 큰 가지 아래로 여인의 젖꼭지 같기도 하고 남성의 성기 모양 같기도 한 유주가 돌출되어 있다. 자식이 없거나 아들이 없는 집에서 남자 성기 모양의 가지를 잘라 가서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여 가지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산모의 젖이 잘 나오게 된다고 믿었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수백년 넘게 푸름을 자랑해 오다가 1990년대 초부터 부근에 빌라와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생장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서울특별시 도봉구는 긴급히 네 차례에 걸쳐 썩은 가지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응급조치를 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다시 진단한 결과 정상적인 뿌리의 생육을 위해 나무 인근의 빌라 2동을 철거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도봉구는 빌라 철거에 대한 보상비와 공원 조성비 등을 포함해 모두 40여억 원의 예산을 들였다.

2012년 현재 빌라 212가구를 매입해 철거를 하고 약 1,421.49의 정자 공원을 만들어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파평 윤씨가 주축이 되어 정월 대보름날 제를 지내 왔으나, 2012년 현재는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제를 지내고 있다.

한편 방학동 은행나무는 국립 산림 과학원의 과학적 수령 조사 결과 550년으로 측정되었다. 그동안 외과 수술로 줄기의 원형이 약간 변형되고 가지가 정리되는 등 나무 갓 역시 원형과 달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수령 측정을 위해 채취한 목편의 상태를 볼 때 수간 중심부가 부후되지 않아 생장 상태 또한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방학동 은행나무는 조선 전기에 식재된 나무로 이 지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수형도 아름다워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기존의 보호수 지정을 해지하고 2013328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방학동 은행나무의 총 면적 20이며, 보호 구역 지정 대상은 총 548이다.

연산군은 1476(성종 7) 11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씨이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첫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로 책봉되었다.

이름은 이융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연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연산군 묘

즉위 이후 신승선, 노사신 등 대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으나, 선왕의 명복을 비는 불교식 행사인 수륙재 시행과 외척의 등용을 두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즉위 1년 후 생모인 윤씨가 사망하게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방치된 윤씨 능묘 천장두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대립하였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국왕(연산군)과 삼사 사이에 더욱 갈등과 대립속으로 치달았다. 재위 4년인 14987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의 내용이 세조를 비판하고 붕당을 만들어 국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조의제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문제삼아 훈구파 이극돈·유자광 등은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많은 신진 사류와 삼사에 속한 대간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왕(연산군)과 갈등을 빚으며 왕권을 견제했던 삼사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이후 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심인 사냥과 사치를 즐겼고 국고의 사정은 나빠졌다. 1504년에는 손녀를 궁중으로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하였다는 죄목으로 경기도관찰사를 지내던 홍귀달이 숙청되었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문제로 번졌다.

성종의 후궁인 정씨 ·엄씨의 모함으로 윤씨가 내쫓겨 사사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또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 ·채청사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에 빠졌다. 경연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그 실정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훈구파를 중심으로 연산군을 폐위하려는 정변이 계획되었고 이에 이조참판 성희안 ·중추부지사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켰으며 연산군은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다. 실록에는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폐위 된 지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선조 이후 정치 세력들이 붕당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파 대립으로 인해 국력은 소진되었으며, 임진 ·병자 등의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하였다.

 

자전거라이딩으로 인천에서 이곳까지 계양대교 하부~행주대교~창릉천자전거길~북한산로~송추앞도로~중랑천자전길~방학동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추천한다.

 

방학동 은행나무 겨울철 풍경
방학동 은행나무 겨울철 풍경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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