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슈바이처, 인천의 전의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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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슈바이처, 인천의 전의철 박사
  • 최문영
  • 승인 2019.12.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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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칼럼] 최문영 / 인천YMCA 사무처장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북쪽으로 140떨어진 만달의 한 양로원. 이곳에는 의지할 데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수용돼 있는데, 헐벗고 굶주린 모습이 참담하다. 식사시간에 저마다 손에 든 밥그릇에는 땟국물이 잔뜩 절어 있다. 한겨울 냉방에도 헐렁한 옷만 걸친 노인들, 대소변으로 범벅이 된 쇠침대와 축축한 요위에 누워있는 중환자, 장님이나 팔다리를 못 쓰는 사람들.

 

사정이 딱하다기에 한번 도와주려고 이곳을 찾았다가 매달 한 번씩 꼭 다시 찾아 의료봉사는 물론 수시로 음식대접을 하고 내복이나 이불 등을 선물한다. 비포장도로가 많은데다 왕복 7시간이 걸리는 곳이지만 한국의 한 의사는 몇 년째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의 바가노르 교도소에도 정기적으로 찾아간다. 죄수 700여명이 수감돼 있는 이곳엔 결핵환자들이 90여명이나 된다. 결핵으로 죽는 이가 연간 30여명에 이르고, 멀쩡했던 사람이 그 안에서 전염되는 예도 흔한 곳이다.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에 이 같은 실정을 알려 연간 4만달러의 지원을 약속받고, 이 자금으로 몽골 보건부와 함께 결핵퇴치사업도 펼친다.

 

몽골의 슈바이처, 전의철 박사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이다.

 

몽골에는 거리의 어린이가 많다. 이혼율이 높기 때문이다. 울란바토르 경찰서는 밤이면 맨홀 속이나 거리에서 지내는 이들을 모아 전 박사가 일하는 NGO 사무실로 데려다 준다. 전 박사와 몇몇 의사들은 아이들을 밤 12시가 넘도록 진료하고 목욕을 시켜주었다.

 

전 박사는 1931년생으로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인천기독병원 의무원장을 거쳐 주안역 앞 사랑병원의 전신인 인천세광병원 원장을 지냈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연세에 한국을 떠나 몽골로 향해 몽골연세친선병원장을 지내며 몽골 현지에서 의술을 펼쳤다.

 

인천에서 줄곧 활동했던 전 박사는 국제와이즈멘클럽에서 아시아지역 총재까지 지내며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인천YMCA에서는 제15대 이사장을 지내며 척박했던 YMCA 운동의 어려웠던 시절 물심양면으로 크게 기여했던 인물로서 YMCA와 와이즈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다.

 

부인 김광신 여사는 1989년 신사임당상을 받은 주인공이다. 그녀는 몽골 사회에서도 '훌륭한 여성상, 훌륭한 어머니상'으로 존경받았다. 그는 미혼모나 극빈 여성들을 보살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사업장에 모이는 여성 이삼십명을 가르치며 털실로 모자 양말 목도리나 장갑을 만들고 여름이면 간단한 치마와 원피스 등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물건은 백화점 등에 위탁판매하여 생활기반으로 삼았다. 김 여사는 울란바토르대 학생들에게 한국예절과 국제예절을 가르치고, 배를 곯는 학생들을 수시로 집에 불러 김밥 피자 햄버거 만들기 실습도 시켰다. 대학에서 받은 월급은 고스란히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전달했다. 일생의 쌈짓돈을 울란바토르 대학에 장학금으로 기증했고, 남편과 아들을 훌륭한 의사로 키워준 연세대 의대에는 자신의 시신까지 의학교재로 기증했다.

 

사실 전의철박사의 모친은 더하신 분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 3.1독립만세운동을 점화한 4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4명이었다. 이중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 독립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2년 선배인 김복희 열사가 주도해서 일어난 백암리 만세운동3.1운동사 가운데 중요한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 김복희 열사가 전 박사의 모친이다. 1925년 전재풍 목사와 결혼한 김복희 열사는 전 목사의 목회지를 따라 강원도를 거쳐 1934년 경기도 화성군의 천곡교회로 오게 됐는데, 이 교회는 당시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이신 최용신 선생(심훈의 상록수주인공)의 계몽운동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의철 박사께서 20191212일 미수(米壽)의 인생을 마치고 소천(所天)하셨다.

 

한국과 몽골에서 최고의 명의로 많은 이들에게 의술과 봉사활동을 펼쳤던 전 박사 부부는 당뇨와 백내장, 퇴행성관절염을 앓거나 중풍 등으로 인해 읽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거동마저 어려워 휠체어에 의존한 채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김광신 여사가 먼저 영면하신 후 이번에 전의철 박사께서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참된 지도자가 그립고 아쉬운 시대에 전의철박사 부부의 삶과 봉사정신은 많은 가르침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평생 남을 위해 일하시다가 전 재산을 헌납하며 몽골에서 마지막 의술로 봉사활동을 하셨고 노구(老軀)를 이끌고 귀국하여 조용히 생을 마감하신 고 전의철 박사의 마지막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죽는 날까지 불쌍한 사람을 위해 일했으면 했는데 이젠 주위사람들에게 짐이 될까 걱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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