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단] 잎 진 자리에 새 울음 돋아나다
상태바
[금요시단] 잎 진 자리에 새 울음 돋아나다
  • 최일화
  • 승인 2019.12.20 08: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기택-의 새울음나무 2 - 최일화 / 시인

새울음나무 2/김기택

 

잎 진 자리에 새 울음이 돋아나고 있다

팔랑거리며 휘날리며
탄력 있는 곡선을 그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뭇잎들은
마음껏 느릿느릿 떨어지고 있는데

새 울음소리만 다급하다
추위가 오기 전에
다 울어야 한다는 듯
남보다 먼저 울어야 한다는 듯

바닥에는 낙엽들이 수북하지만
아직도 떨어질 게 한참이나 남아서
느긋한 나뭇잎들은

떨어져도 그만 안 떨어져도 그만
바람 타고 노닐며
천천히 숲을 날아다니는데

겨울이 와서 울음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울어야 한다는 듯
울지 않은 울음을 다 비워야 한다는 듯
새 울음소리만 호들갑이다

떨어지는 둥 마는 둥
빈둥거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새 울음소리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시 감상> 새 울음소리와 나뭇잎으로 그려낸 한 폭의 풍경화

울음소리와 나뭇잎을 소재로 한 한 폭의 풍경화다. 정밀한 묘사를 통하여 일상으로 보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보고 있는 것은 일차원의 풍경이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이차원 삼차원의 풍경까지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냥 '나뭇잎이 떨어진다' 하고 언급하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시인은 "팔랑거리며 휘날리며/ 탄력 있는 곡선을 그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뭇잎들은/ 마음껏 느릿느릿 떨어지고 있는데"하고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떨어지는 나뭇잎을 육안으로만 볼 수 있도록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심안으로 볼 수 있도록 묘사한 것이다.

3연도 마찬가지다. 그냥 '다급하게 새가 운다' 하면 될 것을 " 울음소리만 다급하다/추위가 오기 전에/ 다 울어야 한다는 듯/ 남보다 먼저 울어야 한다는 듯"하고 일상적인 표현을 넘어선 시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풍경을 관습적으로 보아 오던 독자에게 새로운 각도에서 풍경을 전하는 신선함이 있다. 낯설게 하기란 말은 낯선 풍경, 낯선 주제, 낯선 사물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통념화되고 고정화된 시선을 지양하고 새로운 표현과 묘사로 대상을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도 낯설게 하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가 만약 회화(繪畵)라면 화면에 아기자기하고 흥미진진한 다양한 모양과 색깔을 입혀 일차원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입체적이고 아기자기하고 낯선 풍경을 제시한 경우에 해당된다. "떨어져도 그만 안 떨어져도 그만/ 바람 타고 노닐며/ 천천히 숲을 날아다니는" 나뭇잎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에 이어 "겨울이 와서 울음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울어야 한다는 듯/ 울지 않은 울음을 다 비워야 한다는 듯/ 울음소리만 호들갑이다"같은 청각적 이미지까지 도식화된 표현이 아니라 시인만의 독특한 언어로 묘사해낸 데 시의 묘미가 있다.

폴 발레리는 "시 속의 사상은 과실의 영양가와 같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사과는 먹음직스럽고 향긋한 맛이 있다. 그래서 먹는 것이다. 영양가는 부차적이다. 마찬가지로 시도 읽는 과정에 재미가 있든지,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든지, 혹은 지적 자극을 주어 정신을 맑게 해주는 여러 요소가 있어 읽는 것이다. 정서적 혹은 정신적인 자극을 주어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얼른 봐서는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한 자락 가을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나뭇잎과 새소리가 어우러진 맑은 가을 풍경이 내면으로 흘러들어 상쾌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농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할 것이다. 동심에 젖거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 숨쉬고 싶은 충동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틀에 박힌 사고의 유형에 신선한 변화를 안겨주어 말초혈관까지 혈액이 골고루 흘러드는 것 같은 정서적인 환기를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발레리의 사과의 영양가라고 할 수 있다.

* 김기택: 1989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