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서 뿌린 씨앗이 자라 대학을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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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서 뿌린 씨앗이 자라 대학을 세우고…
  • 김주희
  • 승인 2011.04.13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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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남구 용현1·4동(25)

취재: 김주희 기자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를 따서 이름을 붙인 인하대학교는
하와이 교포가 뿌린 씨앗에 국민들이 거름을 줘 세운 대학이다.
인하대는 용현1·4동과 학익동에 걸쳐 있다. (항공사진=인하대학교)

1902년 12월22일 겐카이마루(玄海丸)호가 긴 뱃고동 소리와 함께 인천항을 출발했다.

이 배에는 대한제국의 첫 합법적 이민자 121명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 제물포에 살았던 이들은 일본 고베에서 신체검사(102명 통과)를 받고 증기선 갤릭(Gaelic)호를 이용해 이듬해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5년 말까지 계속된 하와이 이민자 수는 9천여명. 이들은 고향을 떠나 이국 땅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0시간 고된 노동을 하며 새로운 삶을 꾸렸다.

그러기를 50년. 조국을 되찾겠다는 염원으로 한 푼 두 푼 모은 돈 15만 달러는 이들이 고국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디뎠던 땅 인천에서 고국의 인재양성을 위한 '씨앗'이 됐다.


인하대 교표는 仁川의 '仁'자를 형상화한 것이다.

중국인이 농사를 짓던 땅에 1954년 4월24일 문을 연 '인하학원'은 하와이 이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이름부터 인천(仁川)의 '인'과 하와이(荷蛙伊)의 '하'를 따서 지었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하와이 이민사는 1902년 하와이사탕수수농장주협회 요청으로 시작됐다.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하와이 농장주들은 처음에는 중국인, 그 다음으로 일본인을 데려갔고, 조선인과 필리핀인이 그 뒤를 이었다. 한 나라의 노동력이 많아지면 반란이나 파업이 일 것을 우려해 여러 나라에서 노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하와이 농장주의 요청을 받은 당시 미국공사 알렌이 대한제국 정부에 이를 요구했다. 이어 대한제국 정부는 하와이 이민을 담당할 수민원을 설치했고, 알렌이 소개한 데쉴러가 인천에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하면서 이민자 모집이 본격화했다.


대학초기 기계공학관 옥상에서 바라본 대학 전경.(사진=인하대)
운동장에 피난민 정착지가 그대로 남아 있고, 멀리 매립 전 바다가 보인다.

동서개발회사는 황성신문 등에 광고까지 내고 전국적으로 이민자를 모집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아무리 하와이가 '기회의 땅'이라고 해도 고향을 등질 선택은 누구나 쉽게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당시 인천 내리감리교회 존스 목사가 나서 신도들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교회 신도와 부두 노동자, 좌절한 지식인, 구한국 군인 등이 첫 이민자 대열을 이루게 됐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은 새벽 4시30분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일과를 시작해 6시부터 사탕수수밭에서 10시간 동안 일을 했다. 부지런한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동조건에서도 열심히 일해 번 돈을 한 푼 두 푼 모았다. 농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는 이들도 생겨났고,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학교도 세우게 됐다.

몇차례 부침을 거쳐 1918년 9월 이승만 박사 주도로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이 설립되는데, 이 학교가 인하공과대학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해방 2년 뒤인 1947년 한인기독학원은 해체되고 부지매각 대금 15만 달러가 인하공과대학 설립 자금에 쓰이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4년 10월에 있었던 인하공과대학 개교기념식에서 "(하와이 이민자들이) 그 동안에 번 돈이 15만 달러라. 그 가난한 농장에서 번 돈, 어떤 때에는 떡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서 돈푼 모은(중략) 대학을 하나 만들어서 하와이(이민을) 기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내가 이 학교의 이름을 인천과 하와이의 연락을 만드는 기념으로 한다고 해가지고 그 대학을 '인하'라고 했오"라고 말했다.


1954년 10월5일 개교기념식에서 설립자 이승만(사진 오른쪽) 대통령에게
이원철 초대 학장이 교기를 전달하고 있다.
현재 인하대의 개교 기념일은 첫 입학식이 있던 4월24일이다.(사진=인하대)

인하공과대학의 설립 취지를 설명한 말이다.

이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952년 12월, 피란지 부산에서 당시 김법린 문교부 장관에게 인천에 공과대학을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1953년 2월8일 인하공과대학 설립기성위원회 발기회를 열고, 3월5일 위원회를 조직했다.

학교 설립 자금으로 총 515만 달러를 마련하기로 했다. 하와이 교포의 15만 달러를 비롯해 정부에서 100만 달러, 그리고 국제원조와 국내외 모금 활동 등을 통해 모으기로 했다.

인천시에서도 현재 용현1·4동과 학익동 등지에 걸쳐 있던 시유지 12만5천여평을 내놓기로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54년 2월5일 학교를 운영할 재단법인 인하학원이 설립됐고, 동시에 인하공과대학의 개교도 인가됐다.

인하공과대는 금속·기계·광산·전기·조선·화학공학과 등 6개 학과(각 30명) 180명으로 1954년 4월24일 개교했다. 이 전 대통령이 대학 설립을 지시한 지 1년6개월여 만이다.

한데 당시 학교설립자금은 목표액 515만 달러(3억903만 환)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와이 교포 자금 15만 달러는 대학을 개교한 지 8년만인 1962년 말에 인하대측에 인계됐다.


몇 차례 미뤄 1954년 10월5일 열린 인하공과대학 개교기념식 현판.
'이 대통령 각하 만세'라고 쓴 부분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사진=인하대)

인하대 개교 50년사는 "인하대는 하와이 교포의 15만달러를 기본으로 하여 설립이 추진됐는데, 이 기본금은 이후 학교측과 이사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인계절차가 마무리되지 못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외국원조기관의 원조금도 부진했다.

오히려 국내 모금활동이 더 활발했다. 기업체와 정부산하 경제단체, 독지가 등지에서 돈을 낸 것은 물론, 공무원은 봉급의 5%를 갹출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모은 자금이 총 2억5천만환이었다.

어찌 보면 인하대는 비단 하와이 교포 뿐 아니라, 중앙정부와 시정부, 기업, 그리고 국민들이 함께 만든 대학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인하대의 초기 성격이 애매모호했다.

설립자는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문교부가 설립을 주도했지만,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초대 이사장을 맡은 재단법인이 학교를 운영했으니 '국립'도 '사립'도 아닌 성격을 띠었다.

이런 배경으로 당시 문교부가 각 도(道)에 지방국공립대학을 하나씩 설치할 때 경기도와 인천을 배제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국립대학 없는 인천에서는 아쉬움이 있을 법하다.

인하대는 단지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해 인천에 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 복구를 위한 기술인력 양성이 주된 목적이다 보니, 경인공단을 낀 인천이 적격지였다 할 수 있다.


인하대 후문에 조성된 '문화의 거리'. 밥집과 술집 등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어 항상 열기가 뜨겁다. 최근 물가 오름세 여파로 이 지역 음식점도 가격을 올렸다.

이는 인하공업전문대학 탄생과도 맥을 같이 한다.

첫 졸업생이 배출될 시점에서 인하대는 4년제에서 2년제로 바뀔 위기에 놓였다.

정부는 당장 산업현장에서 일할 기술자가 필요했고, 이런 이유로 인하공과대학의 학제 개편을 논의했다. 반면 대학은 과학자 양성을 위해 대학원을 설치하려고 했다.

대학과 정부의 미묘한 갈등은 1958년 대학 부설 중앙종합직업학교 설치로 마무리됐다. 이 중앙종합직업학교가 지금의 인하공업전문대학의 전신이다.

앞서 1955년 단기직업교육기관인 직업보도학교가 설립되는데, 이는 한독실업학교에서 현 정석항공고로 이어졌다.


인하공과대학 부설 단기기술교육과정으로 시작해
한독실업학교에서 항공기술인력을 양성하는 학교로 발전한 정석항공고등학교.

학제개편 논란이 일단락된 뒤 인하대학은 뜻하지 않는 큰 위기에 빠져든다.

현대사의 격동기,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고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설립자가 이승만이고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으니 인하대를 '자유당'의 산물로 보는 것은 당연했을 터였다. 학장 퇴진과 관련해 교수와 학생, 동문회 등 대학 구성원 간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혼란기는 5·16 군사쿠테타로 이어졌다. 자유당 정권으로 유명무실했던 재단 이사진은 이 때 완전히 해체됐다.

이후 새롭게 이사진을 구성한 학교법인 인하학원은 학교발전은 위한 선택을 한다.

1968년 8월8일 한진그룹 조중훈 사장이 인하공과대학을 방문해 학원 인수 의사를 밝혔고, 같은 해 9월5일 인하학원 운영권 이양식이 개최됐다. 한때 5·16 장학회가 인하학원을 인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대학 설립 14년 만에 애매했던 대학의 성격은 이날부터 '사학'(私學)으로 명백해졌다.


인하공업전문대학 도서관 뒷편 공원에 자리한 대한민국수준원점.
대한민국 수준원점은 인천만의 평균 해면상으로부터 26.6871m이다 .
2006년 4월 14일 등록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한진그룹의 투자로 1969년 대학 본관 신축 공사가 시작되는 등 학교 시설도 늘었고, 학과도 증설됐다. 지역 사회에서 종합대학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1971년 12월31일 인하공과대학은 종합대학으로 승격해 '인하대학교'로 됐다.

1984년 의과대학이 신설됐고, 1996년 중구 신흥동에 700병상을 갖춘 인천의 첫 대학병원을 개원했다. 2007년 로스쿨을 유치했다.

인하대는 2010년 5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송도캠퍼스 조성을 위한 협약을 맺으면서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인하대 본관 옆에 전시된 비행기다.
1955년 하와이 교포 1세의 모국방문때 사용한 것으로
우리나라 민간항공사상 처음으로 태평양을 비행했다.
1969년 퇴역한 것을 대한항공이 1974년 인하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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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2011-04-08 07:41:51
어디에도 이승만이 개인적으로 설립자금을 댔다는 말은 없이 국고지원 대부분하고 공무원 기부금 등이 바탕이 되었는데... 설립자는 이승만이고 이기붕이 이사장이었다는 것은 이것들이 국가지원을 바탕으로 세운 학교를 날로 먹으려 했다는 뜻이네. 결국 그놈들 욕심 때문에 설립 이상을 굳게 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사학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런데도 인하대는 요새 설립자 동상을 다시 세우려고 애쓰고 있다더군. 인하대 동문들은 뭐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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