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맞이 명소로 유명한 '아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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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맞이 명소로 유명한 '아차산'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20.01.07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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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공주와 온달장군 데이트 장소로 유명세 떨친 곳
아차산 해맞이 장면
아차산 해맞이 장면

아차산은 서울특별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를 잇는 높이 287m의 산이며 해맞이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과거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이 데이트를 즐겼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북쪽으로 용마산(348m)이 이어지며, 이 두 산을 하나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따로 구분한다. 서울에 있는 산 중에서는 262m인 남산과 함께 낮은 편이지만, 사람들은 왜인지 남산보다는 훨씬 높은 산인 줄 안다.

그 이유는 남산은 맨 위까지 개발이 되어 있어 공원도 있고 버스가 다니지만, 용마산/아차산은 윗부분이 거의 산 그대로이고, 기슭에만 시설이 있는데다가 마무 것도 없는 험준한 것도 꽤 남이 있으며, 산 자체도 남산보다 크기 때문에 산 몸체가 훨씬 커 보이고 더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용마봉의 북동쪽 사면은 길이 없어 걸어서는 못 오르고, 정상 능선에만 길이 있다.

아차산은 상당히 낮은 산이라 등산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아 서울 동부나 강동 지역의 등산객들이 그런대로 찾는 일종의 동네 뒷산 같은 느낌이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산에는 백제가 쌓은 아차산성과 고구려가 쌓은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있는데, 이 지역은 고구려와 신라까지도 영토 다툼을 벌이던 지역이라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차산은 1990년대에 대규모 발굴을 했으며, 2010년대에는 다시 홍련봉 1, 2보루와 아차산 3, 4보루를 재발굴을 하였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 발굴 과정에서 고구려 관련 유물을 적지 않게 수습했다. 또한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온달 장군의 전사지로 유명한데, 그냥 동네 뒷산에 불과할지도 모를 아차산의 이름을 그나마 전국적으로 알려주는 소재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고구려와 온달의 이름을 가지고 광진구와 구리시, 충북 단양군이 서로 싸우고 있는데, 단양군이 끼는 이유는 온달의 전사지가 아차산성이 아닌 단양군 온달산성이라는 이설이 있기 때문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구리에서 넘어와 아차산 능선을 따라 용마산까지 넘어가지만, 굳이 여기까지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보통 아차산역에서 도보나 주변 버스인 광진 03번 버스로 영화사 방향으로 올라가거나, 광나루역에서 워커힐 또는 광장동 주택가를 뚫고 가는 등산 코스를 고르게 된다.

다만 모든 산이 그렇듯이 지하철역에서 산 입구까지 도보로 꽤 걸리는 만큼 조금은 각오를 하고 올라가자. 버스 타고 가도 좀 오래 걸어야 한다. 자동차로 오는 경우 산 입구에 공영주차장이 있지만 그리 주차면수가 많지는 않아 낮에는 만차가 되기 일쑤이다. 산 위에 지은 고구려정은 주변 지역에서는 높은 편이라 나름대로 해돋이 구경 명소로 꼽힌다.

방송에서는 스무도 멤버들이 188회에서 손대영 입대전 체력단련을 이유로 등산촬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도 2020년 새해에 '2019년을 빛낸 의인' 7명과 함께 이곳을 등산한 적 있다.

아차산에 대한 유래가 하나 있는데, 옛날에 홍계관이라는 점쟁이가 점을 잘 본다는 소문이 있어서 명종이 불러서 시험을 해 보려고 할 때 여기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맞히라는 문제를 내었다.

홍계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쥐 다섯마리가 들어 있다고 얘기하자 왕이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여기에는 쥐가 한 마리만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왕은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속인 죄로 홍계관을 산(아차산)에서 처형하라고 명령하였으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쥐를 갈라보았더니 뱃속에는 새끼 4마리가 들어있어서 그제서야 정확히 5마리였음을 알게 되었고, 왕은 뒤늦게 '아차, 내가 잘못 알았구나!' 하고 후회했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서 처형하지 말라고 했으며 하인이 산으로 가서 처형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그걸 본 처형수는 빨리 처형하라는 소리인 줄 알고는 처형해 버려 "아차!"했다는 이야기에서 아차산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차산의 이름이 이미 있은 후에 홍계관의 이야기를 삽입한 경우라서 결과적으로 이 유래는 정설이 아니다.

참고로, 윤승운의 '겨레의 인걸'이라는 역사 학습만화에서는 점쟁이가 풀러났고, 이 전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으며, 또한 일부에서는 점쟁이와 왕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 판본이나 쥐의 숫자가 다르게 나오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는 야사에서 유래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정확한 유래는 지금도 알 수 없으나, 본디 옛 문헌 등에는 이 지역을 아차(阿且)’아단(阿旦)’등으로 표기 하였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말년에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개명하게 되었고, 피휘라는 전통 덕분에 ''이라는 글자의 사용을 기피하게 되었는데, 두 개 이름 중에 하나는 사용 하면 안 되니 자연스럽게 '아차산'으로만 불리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고구려 제4보루에서 "장소 선정에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여러분이 계신 곳은 아차산 보루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을 놓고 각축전을 벌였는데 이곳은 1500년 전 고구려 군인들이 왔다갔다 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해설가 박씨는 이어 "서기 520년 즈음에 고구려군이 이곳에 머물렀다""놀랍게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이 대통령이 서 있는 이곳 반경 몇 안에서 활동했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진흥왕이 이 자리에 섰다가 비봉으로 올라간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고구려는 소규모 병력으로 이곳을 확보하기 위해 2000명 정도의 군사를 둬서 그나마 80년을 보냈는데, 진흥왕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520년 신라에 넘어가고, 뒤에는 공수가 바뀌어서 고구려를 점령하러 오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다. 실패 기록 가운데 하나가 남아 있진 않지만 온달 장군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박씨는 "단양이 됐던, 여기가 됐던 평화롭게 마주하는 이 공간이 1500년 전에는 하루에도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굉장한 전쟁터였고, 평화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 현장을 답사하는 우리가 전쟁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박씨는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군대를 바로 돌리는데 중국 쪽 군대가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라며 "사민(徙民)을 해야하는데 인구가 적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인구가 같았다고 한다"고 했다.

이어 "장수왕 때 본격 남방을 경영하면서 충북 충주까지 확보했지만 백성들을 고구려 백성이라고 하기엔 역부족이다""고구려는 북쪽은 국경이지만 남쪽은 전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론도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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