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시대에 미디어 콘텐츠가 가야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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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시대에 미디어 콘텐츠가 가야할 길
  • 박교연
  • 승인 2020.02.04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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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시대극, 액션, 스릴러, 드라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자에 대한 강간은 미디어의 주요 소재다. 간혹 영화 <이너프><하드캔디>처럼 피해자가 각성하여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영화가 핵심 줄거리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성범죄 피해자를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거나 남자 주인공을 각성시키위한 장치로 소비한다. 또한, 영화 <내부자들>처럼 영화배경 설명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기도 한다.

 

영화 <내부자들>은 부패한 상위 1% 남성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착취 장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심지어 <내부자들>은 촬영과정에서도 단역배우들에 대한 성착취가 있었다. 2017년 영화 개봉당시에 했던 배우 김홍파(58)의 인터뷰를 보면, 단역배우들에게 촬영을 제대로 못 할 거면 배우를 교체해야하니까 빨리 정신 차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양성평등기본법 제3조 제2호에 상대방이 성적 언동 또는 요구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행위에 해당한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여배우 중 한 친구가 촬영 중에 정신적으로 무너져서 촬영을 못하게 됐어요. 촬영이 굉장히 많이 지연이 됐습니다. 그때서야 제가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제가 막내니까 백윤식, 이경영 선배 두 분은 밖에 나가 계시라 하고 여배우들과 한참 얘기를 했습니다. 여배우들에게 나도 처음이다. 나도 민망하고 쑥스럽지만, 우리가 영화는 완성은 시켜야하지 않냐고 말했습니다. 할 거면 제대로 하고 못하겠으면 여기서 그만두자고 했죠. 배우를 교체해야 하니까요. 그러자 그 친구들도 정신 차리고 의기투합해서 34일간 꼬박 그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촬영장에서조차 이런 일이 벌어지다보니, 당연히 결과물인 영화나 드라마 등 미디어 콘텐츠에서 성범죄와 성착취가 아무런 맥락도 없고 고민도 없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곤 한다. 혹자는 이를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겠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장면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것은 제작자, 투자자, 감독, 작가가 보고 싶은 혹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길 수가 없다. 후에 자극적인 장면만 편집되어 외려 강간문화를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구글에 영화 <후궁>, <리얼>, <상류사회> 등을 검색해보면 파격 노출신’, ‘노편집 무삭제 노출과 같은 단어가 연관 검색어로 따라붙는다.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이라는 말에 노출연기를 감행했던 배우에게는 계속해서 성적인 수식어와 희롱이 동반되며, 커리어에도 치명적인 오점이 남는다. 물론 이건 남자 배우에겐 해당 없는 이야기다. 조진웅, 김동욱, 백윤식, 이경영 등은 노출연기 이후에도 이미지 손상 없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범죄나 성착취 문제를 미디어 콘텐츠에 접목시키면 좋을까? 분명 좋은 콘텐츠에는 문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해결을 촉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아래의 몇 가지 좋은 콘텐츠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룰 때 참조해야할 부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미스테리어스 스킨>은 아동 성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단 한 장면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범죄 이후 10년 동안 피해자가 겪는 혼돈과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아동 성범죄를 강력하게 지탄한다. 영화 <>7년 동안의 납치 감금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활용했지만, 불편한 장면 연출이나 설명을 넣지 않아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은 원치 않게 끔찍한 범죄를 당해야만 했던 피해자들의 상처와 회복하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88회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스포트라이트> 역시 성범죄의 직접적인 묘사를 넣지 않았다. 영화는 보스턴 글로브기자들이 사실을 밝히기 위한 고군분투를 담담하게 따라가며, 가톨릭이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보스턴 교구의 사제 성범죄를 고발한다. 심지어 <스포트라이트> 끝에는 가톨릭 사제 성범죄가 보스턴 교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에 걸친 세계적인 문제라는 걸 환기시키는 자막이 나온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좋은 드라마다. 그동안 남성 형사물에서는 <트루 디텍티브><마인드 헌터>와 같은 평가가 좋은 콘텐츠에서조차 피해자가 자극적으로 살해당하고 강간당하고 소비되는 동안, 형사는 자기연민에 빠져있거나 자기고민에 매몰되곤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속 두 형사는 한순간도 피해자를 잊지 않는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최대한 배려한다. 강간을 다룬 드라마지만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이야기 전개를 침착하게 따라가다 보면 연쇄 강간범이 밝혀진다. 하지만 밝혀진 범죄자는 참으로 하찮고 비겁하고 한심한 존재다. 그에 대비해 피해 사실을 딛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성폭행 생존자 마리의 존엄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지극히 당연한 이 메시지를 완성도 높게 전한다.

 

지난 달 127일에는 민주당 영입인재 원종건의 성범죄 피해자가 상세하게 범죄행각을 폭로했고, 2달 전에는 김건모의 성폭행 피해자들이 잇따라 미투를 선언했다. 2017년 이후 여전히 각계에서 여성대상 범죄에 대한 고발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런 시대에 여성대상 범죄를 그저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미디어는 더 이상 영화 <추격자>에서처럼,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처럼 피해자를 그저 스릴러의 소재로 사용해선 안 된다. 앞서 언급한 좋은 영화들에서처럼 최대한 묘사를 배제하고,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서처럼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메시지를 강도 높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그게 미투 시대에 미디어 콘텐츠가 가야할 길이다. #Metoo, #Withyou.

 

88회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스포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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