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논어(論語)』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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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논어(論語)』를 읽으며
  • 이승후
  • 승인 2011.04.18 17: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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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 칼럼] 이승후 교수 / 재능대 아동보육과


『논어』가 무슨 뜻인가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이렇다. '논'이라는 글자에는 '정리', '편찬' 등의 뜻이 있고, '어'라는 글자는 '두 사람이 서로 대등하게 말하는 것'의 뜻이 담겨 있다.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논어』는 정리, 편찬을 거친 대화, 즉 '대화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논어』는 공자가 제자와 당시 사람들에게 대답한 말, 제자들이 서로 한 말, 그리고 공자에게 들은 말이다. 당시에 제자들이 각각 기록한 것을 가지고 있다가 공자가 죽자 문인(門人)들이 서로 모아 의논하고 편찬하여 『논어』라고 한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논어』가 공자와 그의 제자들 간 대화를 기록한 책이란 사실도 모르던 시절에 처음 접한 구절이다. 지금은 명색이 서생(書生)으로 살아가지만 학문의 '학'자도 깨닫지 못했을 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우스개 정도로 읊었던 구절이다. 고등학교에 들어서야 이 구절의 한자 說 을 말씀 '설'이라고 읽지 않고 기쁘다는 의미를 가진 '열'로 읽어야 한다는 주의와 더불어, 알에서 갓 깨어난 새가 날갯짓을 하며 하루하루 나는 연습을 하듯 배운 걸 익히는 게 기쁘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공자님 같은 말씀이라며 귓등으로 들었다. "공부가 뭐 그리 재미있어 배우고 익히는 게 즐겁다고 책의 제일 첫머리에 쓴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 뒤에 나오는 '벗이 있어 먼 곳에서 나를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친구를 반기는 구절-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이 훨씬 마음에 와 닿았다. 교복 벗고 한껏 멋 부리며 친구 집에 가서 유식한 체하며 써먹던 말이자, 나를 반기지 않는 친구들에게 볼멘소리를 전할 목적으로 입에 올렸던 구절이었다. 물론 친구를 뜻하는 한자 중 붕(朋)이 같은 스승에게 배운 벗을 말하며, 우(友)가 뜻을 같이 하는 벗을 의미하는 말임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대학시절에는 학과의 일상이 재미가 없어 학보사 활동을 하며 취재하고 기사 쓰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다. 자연 강의에는 충실하지 못했다. 그 때 그야말로 호랑이 선생님이라 할 진태하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바로 아는 것이다'라는 부분을 읽고 나는 공자를 '공자님'으로 우러르기 시작한다. 내게 어떤 제자가 "선생님, 안다는 게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데 이렇듯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내가 공자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근사하고 멋진 답을 찾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논어』에서 공자님을 인간적으로 보게 된 인상 깊은 구절이자, 내가 공자님 팬이 된 계기를 만든 부분이다.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명칭인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등의 명칭은 내용상 특별한 의미 부여보다는 적당한 양을 묶어 나누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두세 글자를 취해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사실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공자의 본명이 孔丘(공구)이고, 자(字)가 仲尼(중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생소함도 이즈음 사라진다. 60이 넘은 아버지 숙량흘과 젊은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야합으로 태어났다는 사기의 기록도 공자 집안이 그리 귀족적이지 않은 듯하여 오히려 친근감을 부른다.

그래선지 다른 건 몰라도 논어만은 제법 읽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논어』에 대해서만큼은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책방에서 눈이 가는 논어 관련 책이 있으면 사 모으다 보니 서가 1칸을 『논어』로 채워도 남는다. 책마다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누가 또 다른 주석을 달았을까 궁금해서 구한 것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안타깝게도 논어는 좀더 찬찬히 깊게 봐야 할 것 같아 여전히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내가 이 <고전 읽기>라는 지면에서 『논어』를 첫 번째로 거론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아직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안철수 교수는 시간이 없는데도 새로운 내용을 공부해야 할 때는 일부러 관련된 내용에 대해 원고를 쓰겠다고 자청한다고 한다. 약속을 했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울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집중력을 발휘하여 공부할 수 있기에 단 시간에 그 내용에 대해 해박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이 지면의 청탁을 흔쾌히 승낙한 것도 안철수 교수를 흉내낸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그와 같은 천재류는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 신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면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대학 때 민족문화추진협의회(현재는 한국고전번역원이다)에서 공부한 얍삽한 밑천 때문이다. 학보사에서 늘 원고 마감에 쫓겨 1주일마다 헉헉거리는 생활이 싫증나기 시작할 즈음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것이 못난 나를 일으켜 줄 거라는 믿음 아래 그때는 정말로 시간을 잘게 쪼개며 살았던 것 같다. 이미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것은 큰 강 너머로 떠나보냈다. 민주화의 열기 속에 빗겨 있어야 하는 겁먹은 자들의 시절이라 더욱 그러했다. 사실 국문과에 다니면서 <사서삼경> 정도는 꿰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바람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고, 일찍 문(文)에 뜻을 둔 일부 친구들이 지곡서당(현 태동고전연구소) 등을 기웃거리며 현학적(衒學的)임을 자랑하고 있던 터였기에 나는 논어만이라도 아는 체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느 게 더 결정적인 이유였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양반의 자손으로 동양 고전 정도는 한 번 손에 잡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민족문화추진협의회에서 만난 『논어』는 깊이가 있었다. 유신이 끝나고 또 다른 군부가 들어오고 온갖 사회변혁이론이 저류에 흐르고, 그것을 한 줄 한 줄 되새기며 앞으로 다가올 새 역사에 대한 모의(模擬)가 횡행하였다. 서구이론서에 경도되어 그걸 말하지 않으면 덜 떨어진 것 같던 시절, 나는 이상하게 『논어』 속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대안을 보았던 것 같다. 『논어』가 우리와 우리 사회를 크고 넉넉하게 또 어질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논어』 속에서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비방(秘方)을 본 듯도 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의 유희나 관념의 고고함 따위는 『논어』에서 찾지 못했다. 기원전 사람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서로 대화하던 그 내용이 바로 당대의 문제점이었고, 그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논어』는 그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지면에서 『논어』를 제일 먼저 집어든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나 공자 제자들이 『논어』를 정리하던 시대나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이나 지금 이 시점이 그리 크게 달라진 게 없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잘 사는 문제'가 여전히 화두이고, 사람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가 아직도 고민인 시대이다. 그래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논어』를 비롯하여 우리의 동양 고전(古典)에서 우리가 귀 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들을 독자 제위와 함께 쉬운 말과 오늘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려고 한다.

다만, 몹시 두려운 것은 지금까지 이미 논어 관련 책이 3천여 권이나 발간되었다 하고 근자에는 리쩌허우의 '논어금독'은 물론 김형찬의 '논어이야기'와 김학주의 '논어'나 한필훈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훌륭한 번역본이 나와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자기계발서를 표방하고 펴낸 책도 양병무의 '행복한 논어읽기' 등 여럿이다. 이우재 선생의 <인천in> 연재내용 역시 내 논어이야기를 주눅들게 하지만 논어공부의 또 다른 자양분으로 삼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시대의 고전(古典)을 통해서 여러분과 만나겠다는 내 의도가 얼마만큼 실효성 있게 전개될지는 모르겠다. 첨단 멀티미디어 시대, 단 1초도 정체되는 법이 없이 급변하는 이 시대에 고전은 시효가 끝난 논의가 아닌가 하는 반문(反問)도 상당할 것이다. 더구나 정전(正典, canon)이 사라진 시대, 모든 의미와 가치가 사변화하여 재구성되는 '과정의 시대'에 말이다.

그럼에도 고전과 정전이 우리시대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 다양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박제로 만들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범부의 눈으로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냄새를 맡아 보려고 한다.

황사비가 내린 뒤 오히려 하늘은 맑아지고 꽃은 더 화사하게 피어 아름다운 봄의 소리를 들려준다. 이제 본격적인 봄이다. 나의 '고전 읽기'가 달갑지 않은 황사비처럼 찾아왔더라도 그 이후에 맑게 개는 하늘처럼 독자 제위의 마음이 초록으로 물드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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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2011-04-19 00:00:16
어려운 글 쉽게 쓰셨네요ㅎㅎ 과제땜에 논어 검색하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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