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하고 건강한 아이, 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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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고 건강한 아이, 상규
  • 권근영
  • 승인 2020.03.04 0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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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숙과 형우의 막내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집 앞에서 상규와 도영과 강아지 해피

 

1965년 1월 남숙은 막내 아들 상규를 낳았다. 한밤중에 소리소문 없이 아이를 낳아 동네 여자들이 어디서 아이 하나 데려온 거 아니냐며, 배를 보니까 낳긴 한 거 같다며 장난했다. 첫 아이 인구를 밤새도록 고생하다 낳아서, 둘째는 참 수월하다 여겼는데, 막내는 일도 아니었다. 그때 남숙의 나이가 마흔하나였고, 형우는 쉰둘이었다. 형우에게 상규는 쉰둥이였다. 늦은 나이에 얻은 막둥이라 그렇게 구여울 수가 없었다.

 

형우는 참외전거리에서 일을 마치면 꼭 먹을 걸 사 들고 왔다. 멍이 들어 팔지 못하는 사과라던지 알파벳 모양의 에이비씨 과자라던지, 토끼나 개 문양의 동물 과자, 센베이 과자 같은 걸 사 들고 왔다. 형우가 집에 도착하면 아이들이 그 앞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형우가 과자를 내려놓으면, 상규는 과자를 가장 많이 끌어안고는 모두 자기 것이라고 욕심부렸다. 형우는 그 모습이 귀여워 그냥 웃고 말았다. 상규는 과자를 차지하고는 형우의 밥상 앞에 앉는다. 남숙이 저녁 먹어놓고 왜 또 그 앞에 앉냐고 한 소리 해도, 상규는 움직이지 않는다. 형우가 생선 살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면, 상규는 저녁을 처음 먹는 것처럼 맛있게 먹었다. 첫째 인구와 둘째 도영이 어려서부터 병치레로 고생을 많이 했기에, 잘 먹고 건강한 상규가 고마웠다.

 

겨울이 되면 형우가 손수 코바늘로 장갑, 목도리, 윗도리, 바지, 양말까지 털실로 떠서 상규를 입혔다. 상규는 누런 코를 흘리며 추운 겨울에도 동네를 뛰어다녔다. 송림동 집 뒤 언덕에는 너른 밭이 하나 있었다. 밭 좌측에는 하수구 물이 흘렀고, 겨울이 되면 그 물이 꽁꽁 얼어서 경사가 졌다.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상규는 비료 포대를 가지고 가서 썰매를 탔다. 털옷이 헤지는 것도 모르고 신나게 썰매를 탔다. 집에 돌아와서는 썰매 타지 않은 척 연기 했다. 하지만 금방 탄로 났다. 온 몸에 밴 하수구 냄새 때문이었다. 남숙은 가마솥에 물을 끓여 상규를 홀딱 벗겨 씻겼고, 도영은 상규의 헤진 털옷을 손봤다.

 

도영과 상규는 여섯 살 터울이었다. 상규는 도영을 언니라고 부르며, 꼭 따라다녔다. 남숙이 도영에게 현대시장에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때도 상규는 먼저 일어나 고무신을 신었다. 상규는 돌아오는 길에 업어달라고 칭얼댔다. 도영은 상규를 업어서 한 손으로는 궁둥이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그릇을 들고 언덕 계단을 올랐다. 힘이 들어 상규에게 내려서 걸어가자고 하면, 목을 더 끌어안았다. 상규는 도영의 등짝에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았다. 찰거머리 같았다.

 

한 번은 상규가 뭘 잘 못 먹었는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가렵다고 박박 긁고, 데굴데굴 구르고 난리가 났다. 남숙은 와룡 회사로, 형우는 참외전거리로 일하러 가서 집에는 도영과 상규 둘뿐이었다. 도영은 아랫집 아줌마에게 갔다. 상규를 보였더니, 염전에 가서 씻기면 쏙 들어갈 텐데 멀어서 어떻게 가겠냐고 했다. 도영은 상규를 데리고 현대시장으로 갔다. 상인에게 염전 가는 방향을 물으니 시장 옆길로 쭉 올라가서 송림고개를 넘어 걸어가면 염전이 나온다고 했다. 송림고개를 넘어, 성냥 공장과 나무 도시락 공장을 지나 1 염전에 도착했다. 염전 저수지라고도 했는데, 바닷물이 들어올 때 물을 받아놨다가 그 옆에 소금 만드는 염전에 물을 대는 저수지였다.

 

도영은 상규를 한 귀퉁이에 세워놓고 옷을 홀딱 벗겨 짠물로 30분을 넘게 씻겼다. 아랫집 아줌마가 일러준 대로 물을 흘리면서 살살 두드려줬다. 벅벅 문대면 살이 빨갛게 까진다고, 흉지지 않게 조심했다. 맑은 물로 씻기지 않고, 바로 옷을 입혀서 집까지 되돌아왔다. 상규가 등에 업혀 잠이 드니 늘어져서 힘이 들었다. 눈 좀 떠보라고 해도 계속 고개를 땅으로 떨궜다. 도영과 상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녹초가 돼서 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밤이 되어 일을 다녀온 남숙이 도영에게 상규가 왜 이러냐, 어디 다녀왔냐 물었다. 도영이 자초지종을 말하니, 남숙은 거기가 어디라고 차 다니고 위험한데 아이를 업고 다녀왔냐며 도영의 등짝을 때렸다. 도영은 성질이 나서 입이 삐죽 나왔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상규는 두드러기가 쏙 들어가 다시 동네를 빨빨거렸다.

 

상규가 동네에 매일 드나드는 집은 선생네였다. 동네에 손꼽히는 부잣집이자 상규와 동갑내기 외동아들 상우가 사는 집이다. 상우의 엄마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이고, 아빠는 고등학교 체육선생이었다. 할아버지는 고등학교에서 교장을 해서, 동네 사람들이 선생네라고 불렀다. 동네 사람들은 선생네 가는 걸 조금 어려워했는데, 상규는 눈만 뜨면 그 집에 갔다. 선생네 가면 신기하고 맛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

 

상규는 토스터기가 정말 신기했다. 타이머를 맞추고, 빵이 다 구워지면 뻥 하고 튀어 오르는 게 재밌었다. 잘 구워진 빵에 땅콩잼도 발라 먹고, 딸기잼도 발라 먹었다. 비싼 햄과 소시지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상규가 맛있게 먹으면 상우도 따라 먹었다. 상규가 계속 먹으니까 상우가 그만 먹으라고 했다. 상규는 싫다면서 두 개, 세 개 계속 먹었다. 그러면 상우가 질투가 나서 자기도 열심히 따라 먹었다. 상우 엄마는 상규가 매일 오는 게 좋았다. 선생네에서 상규는 언제나 대환영이었는데, 이유는 깡마른 상우 때문이었다.

 

상우는 얼굴이 주먹 만하고 빠짝 말랐다. 입이 짧아서 잘 먹지 않았고, 아파서 누워있는 날이 많았다. 집 마당에서 운동하라고 자전거도 사줬지만, 혼자서는 기운이 없어 잘 타지 않았다. 상규를 만나고 상우는 달라졌다. 안 먹던 샌드위치도 먹어보고, 소고기도 먹었다. 상규가 먹는 만큼 상우도 먹으려고 했다. 마당에서 포도도 따 먹고, 자전거도 같이 타고 놀았다. 씩씩한 상규를 따라 상우도 조금씩 건강해졌다.

 

종일 신나게 뛰어놀고 집에 돌아온 상규는 큰 형 인구가 도착하기 전에 이불에 들어가 자는 척을 했다. 인구가 아침에 내주고 간 숙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인구가 빈 공책을 보고는 상규를 깨우려 했다. 남숙은 그냥 자게 두라고 했다. 남숙은 상규가 공부를 조금 못해도 괜찮았다. 건강하고 씩씩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장롱 하나와 책상 하나 있는 작은 방에 다섯 식구가 눕는다. 온종일 고달팠던 몸을 푸근한 솜이불에 누인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상규는 인구에게 혼날 거지만 걱정 따윈 하지 않고, 가족들의 온기를 느끼며 잠든다.

 

선생네에서 상우와 상규
선생네에서 상우와 상규
상우의 자전거를 타는 상규
상우의 자전거를 타는 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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