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대한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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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 대한 단상(斷想)
  • 허회숙
  • 승인 2020.04.1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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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허회숙 / 전 인천시의회 의원

시인 T.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신앙부재와 정신적 황폐를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표현한 상징적 작품이다.

우리에게도 가장 잔인한 달 4월이 왔다. 청명인 4월4일부터 코로나 지역감염을 막으려는 정부방침에 따라 인천의 가볼만 한 공원은 모두 빗장이 걸리고 말았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지난 두달 동안 점심 이후 남편과 나누곤 하던 대화이다.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아 날씨와 컨디션에 따라 대공원이나 동네공원 중에서 하나이다. 그런데 4월 19일 까지는 이 대화도 필요 없어졌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가 발생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지난 해 12월 말경이다. 우리나라는 ‘문 열어 놓은 채 모기를 잡는’ 방역을 하는 바람에 확진자 10,613명, 사망자 229명을 넘어섰다. 그래도 코로나 검진 키트를 조기개발한 민간업체와 우수하고 헌신적인 의료진과 간호인력, 전 국민이 부담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건강보험 시스템의 역할과 함께 이를 조율하고 지휘한 정부의 공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역경을 수없이 겪어내며 살아온 우리 국민들은 사재기 하나 없이 의연히 버티어 주고,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효율적인 방역을 이루게 해 주어 대한민국의 의료 방역체계를 세계가 주목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82,295명의 확진자와 3,342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세계로 퍼져나간 코로나가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유럽과 미국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휩쓸고 있는 요즈음 우리나라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양호하여 국민들이 이를 인정한 것이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둔 큰 요인중 하나였다고 본다.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의 지식인들과 우리 이웃 곳곳에서 탄식과 자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 오지의 챠드라는 작은 나라 시인 무스타파 달렙은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에 흔들리는 인류,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불리우는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다. … 순식간에 우리는 매연, 공기오염이 줄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이 갑자기 생겨 뭘 할지 모르는 정도가 되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으며, 일은 이제 더 이상 삶에서 우선이 아니고 여행, 여가도 성공한 삶의 척도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 하늘의 힘에 맞갖으려 했던 인간의 지식 또한 덧없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 인간은 그저 숨 하나, 먼지일 뿐임을 깨닫는 것도…섭리가 우리에게 드리울 때를 가다리면서 스스로를 직시하자. … 집에 들어앉아 이 유행병이 주는 여러 가지를 묵상해 보고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자.’

코로나 사태이후 ‘고립감’ ‘건강염려’ ‘무기력’같은 심리이상을 겪었다는 성인이 54.7%에 이르고 열 명중 넷은 체중이 늘어 ‘확찐자’가 되었다. 주부들의 분노지수는 폭발직전이고 가정폭력, 이웃 간의 분쟁도 전 세계적으로 늘었다. 이혼도 늘어 ‘코로나이혼(Covidivorce)’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고 이혼 위기 부부에게 상담과 임시로 별거할 거처를 제공하는 사업 아이템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코로나 베이비 붐’ 사태가 예상된다는 전망도 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리라는 예측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 부부는 70년대 초 단칸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이래 일과 성취를 위해 40여년을 달려오다가 정년을 맞았다. 남편은 퇴직 후에도 요즈음까지 주 2~3회는 서울, 안양 등지로 바둑이며 술친구를 만나러 다니고, 동네 친구나 직장 후배들과의 모임도 많아 늘 밖으로 나돌았다.

나 역시 정년 이후에도 여러 가지 사회활동도 하고, 모임이나 회식 등 남편과 행동반경이 달라 최근까지도 아침에 집을 나오면 부부가 저녁을 함께 하는 날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도 정부에서 강경책을 펴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자기 패턴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나 점차 인천지역사회에도 감염자가 늘어가고 기저질환 있는 노인들이 더욱 위험하다는 경고성 메시지가 거듭되자 드디어 우리 부부도 집 밖 나들이를 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며칠을 집에만 있어 보니 하루가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바쁜 속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낙이었건만 질편히 앞에 놓인 무료한 시간 속에서는 책도 영화도 즐거움의 빛이 퇴색해 버렸다.

정신적으로도 무기력증과 우울감에 매몰되니 오히려 면역력이 약화되는 듯 했다. 밖에 나가 햇볕도 쬐고 봄꽃도 보고 새소리도 들으며 걷자고 하여 점심 먹고 나면 동네공원이나 인천대공원으로 나가기 시작한 지가 두 달 여가 지났다. 술이 안 들어가면 말이 없는 남편도 함께 걸으면서부터 옛날의 추억거리를 많이 기억해 낸다.

젊은 시절 우리 둘의 직장이 가까운 곳에 있어 아침이면 함께 차를 타고 자유공원에 올라 공원 산책로를 한 두 바퀴 돌고 신포동 다방에 들러 모닝커피 한잔씩 하고 출근하던 때 이야기며, 애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거의 매년 시어머니도 모시고 휴가여행을 다니던 때 술 좋아하는 남편이 저지른 수많은 해프닝 등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지곤 한다.

며칠 전 남편이 우리 결혼생활 49년 동안 이번처럼 긴 시간을 둘이서 함께 보낸 적이 없지 않았느냐고 한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삼시세끼 꼬박 같이 먹으며 24시간을 함께 지내 본 적이 그동안 없었다. 매일 오후 한두 시간 남편과 산책을 하며 대화의 물살 속에서 건져낸 옛 추억의 파편들이 소중하게 반짝인다. 언젠가는 ‘그런 봄도 있었구나’ 하고 아쉬움과 그리운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날들도 오지 않을까 싶다.

옛부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이 있고, 이 세상에 좋기만 한 일도 없고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는 말이 있다. 전 세계적인 재앙이 되고 있는 코로나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역설적으로 긍정적 면이 부각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가 아무 대가도 없이 마시고 살아온 산소의 감사함이 산소 호흡기의 부족으로 다시 일깨워지고, 그렇게도 인류의 숙제가 되어왔던 환경정화가 미물인 바이러스에 의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인간의 오만과 무능력을 깨닫기도 한다. 함께 앉아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들던 일상의 소중함을 당연시 여기던 가족, 친구, 친지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만날 수 없게 되자 애틋한 마음을 담아 카톡을 주고받는 심리적 다가서기로 변모하는 모습들도 많이 보인다.

이제 가장 잔인한 달 4월이 가고 가정의 달인 5월이 오면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많은 가정에서 뜨거운 포옹이 일상이 되어도 괜찮아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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