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포장 받은 '인천'의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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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포장 받은 '인천'의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
  • 송정로 기자
  • 승인 2020.06.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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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인천 민주화운동에 선구적 역할
문재인 대통령, 6·10 항쟁 33돌 맞아 미국인 성직자 2명에 국민포장 수여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

6월10일 열린 6·10민주항쟁 33돌 기념식에서 1978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종교계, 학계, 시민사회 인사 12명에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됐다.

그리고 이날 이들 12명과 함께 국민포장이 수여된 미국인 선교사 2명이 있다. 조작된 인혁당 사건에 분노하며, 재야 민주화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이들이면서 인천지역을 기반으로 민주화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이들이다.

미국 감리교 조지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가 1962년 화수동 초가집에서 시작한 인천산업선교회는 인천지역 노동운동, 주민운동의 모태가 됐다. 1954년 한국에 들어온 오글 목사는 1961년 4월 인천에 정착했다. 노동목회를 사명으로 무장한 오글 목사는 당시 조용구, 윤창덕 목사 등과 동일방직, 한국기계공업 산업전도에 나섰다. 조승혁, 조화순 목사는 인천산업선교회의 1, 2대 총무로 각각 대성제재소, 동일방직에 취업(1966), 소그룹 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우며 프로그램을 통해 노동자교회를 개척했다.

조승혁 목사는 인천중공업, 한국베아링 노사분규 배후혐의를 받아 고문을 받기도 했다. 조화순 목사는 1974년 5월 노동자 야외예배 설교를 했다는 이유(긴급조치 1호)로 구속됐고 이해 12월 조지 오글 목사도 인혁당 고문조작설을 제기했다 추방당했다.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1974년에 있었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조직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가 있다고 발표해 시작됐다. 이후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도예종 등 8명의 사형을 확정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9일 사형을 집행해버린 사건이다. 당시 언론이 모두 숨죽이고 있던 때, 푸른 눈의 두 성직자가 이를 공론화했다.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8명은 2007년 1월 32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시노트(한국이름 진필세) 신부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60년 6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한국에 들어와 인천교구 송림동본당 보좌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화수동성당, 백령도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1965년 8월 영종도성당 주임신부로 사목을 시작했다. 10년을 영종도성당에 있으면서 해변매립을 통한 구호사업, 도로확장, 의료사업, 무료약품 보급, 결핵퇴치 운동 등을 벌이며 주민의 삶을 위해 헌신했다.

영종도성당에서 사목에 전념하던 시노트 신부는 1974년 4월 인혁당 사건이 고문 및 공판기록 변조 등으로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고발하며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운동에 나섰다. 결국 시노트 신부도 1975년 4월 체류기간 연장 불허로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2003년 한국에 정착했다가 2014년 12월 85세의 일기로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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