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6.25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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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생존기
  • 강양희
  • 승인 2020.06.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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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강양희 / 연백 실향민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 살고 있던 나는 1949년 9월 1일 연안읍에 있는 연백농업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1948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된 교육법의 시행으로 중•고가 분리되고 학기가 9월1일에서 4월1일로 변경되면서 입학한지 9개월만인 1950년 4월1일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을 먹고 있는데 38선 바로 남쪽 동네인 연백군 석산면에 사시는 외사촌 누나가 뛰어 들어오며 “고모님 무엇하고 계세요? 뒷산에 인민군이 새까맣게 있어요 빨리 피하세요!”라고 소리첬다. 어머니, 형님, 형수, 나와 동생 2명은 서둘러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보따리 몇 개를 준비하여 남쪽으로 떠났다.

십리쯤 왔을 때 이미 앞서 온 인민군이 우리 일행(피난 행렬 약 20명)을 향해 총을 쏘았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되돌아 다시 집으로 갔다. 그 때부터 초등학교 교사이던 형님(당시 26세)은 학교 천장에서 몇몇 선생님들과 숨어서 생활하였다. 7월 초순에 학교에 갔더니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하였다. 일부 선생님들은 안 나오시고 북한 정권을 용납하고 환영하는 선생님들이 출근하여 수업은 얼렁뚱땅 하면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가르쳤다. 그 다음날은 바로 여름방학 조치를 하고 귀가시켰다. 방학이 끝나고 9월 1일 학교에 등교하니 휴교 조치하며 안정될 때까지 집에서 쉬라고 했다. 그 후 1950년 9.28 수복 직후 우리가 살던 연안읍은 인민군이 물러나고 다시 대한민국 세상이 되었다.

그해 12월 하순이 되자 읍내 방송으로 임시 남하하니 젊은이들은 남쪽으로 피난하라고 했다. 북한군에 끌려갈 염려가 있는 형님과 청년 선생님 5분이 무작정 서울을 향해 집을 떠나 피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형님은 2개월여를 병환으로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나를 보호자 삼아 동행시켰다.

피난 첫날, 개성 근처 사람들이 떠난 빈집에서 하루를 쉬고 이틀 뒤 서울에 도착했다. 그날은 여관에서 잤다. 다음날 서울 회현동 숙부님 댁에 가 보니 이미 숙부님은 피난을 가시어 안 계시고 거기에서 큰댁 사촌 형제들을 만났다. 당시 청년들은 길에서 잡혀 군에 징집되었으므로 형님들은 피해 다니기로 하고 동갑내기 사촌과 나는 다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1월 4일 수원의 한 농가(나중에 알고 보니 수원 피잔동)에서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멍석을 깔고 잠을 자고 있는데 밤 1시쯤 중공군이 남하한다고 하여 다시 동네를 떠났다. 캄캄한 밤중, 넓은 길에 꽉 찬 피난민 대열에 끼어 무조건 남쪽을 향해 걸었다. 1월 5일 아침에 평택에 도착하여 역에 있는 기차 지붕 위에 올라탔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기차는 한밤중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역전 광장에는 고믈상에서 얻은 것인지 폐타이어를 태우고 그 주위에 피난민들이 모여 밤을 새우고 있었다.

1월 6일 아침, 부산으로 가려 하였으나 UN군이 길목마다 지키며 부산 지역은 피난민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 갈 수 없으니 전라도 지방으로 가라고 하였다. 전라선 기차 화물칸에 올라타고 신태인역까지 가서 기차에서 내렸다. 그때 숙모님의 언니 되는 분이 그곳 군청 근처에 사신다는 기억이 떠올라 정읍군 정주읍(현 정주시)으로 걸어갔다. 수소문 끝에 군청과 경찰서가 있는 마을에서 그 댁을 찾았다. 뜻밖에 숙모님이 두 딸과 그곳에 계셨다. 숙모님 언니 가족 3명, 숙모님과 딸 2명 나와 사촌형 8명은 그곳에서 1951년 5월 6일까지 피난 생활을 생활하였다.

당시 그곳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는 지역으로 사방에 빨찌산들이 널려 있고 다른 지역과 단절된 곳이였다. 이․삼일 지내다 밥값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입고 있던 외투와 손목시계를 팔아 길거리에서 담배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는 시원치 않고 밥을 얻어먹는 신세가 불안하고 괴로웠다.

1951년 5월 6일 시장에서 쌀을 싣고 있는 트럭을 발견하고 몰래 그 차를 탔다. 당시 전황은 개성을 국군이 수복했다 다시 내 주었다를 반복하며 휴전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고 있는 중이였다. 그 트럭은 후생 사업을 하는 경찰차였다. 나는 빨리 집에 가려면 국군의 북진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대전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렸다. 서울로 가려니 국도는 일반인은 못 다니게 되어있다고 해서 지방도로를 따라 서울을 향해 걸었다. 평택, 안성천에 도착하니 서울로는 가지 못하게 하여 인천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부평에 있는 작은 할아버지 댁에서 일주일 동안 묵고 인천 시내로 갔다. 답동 긴담모퉁이 길에서 은사님을 만났는데 형님이 인천에 계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형님이 사촌들과 작은 할머니 식구와 같이 계신다는 집을 찾아갔다. 중구 전동에 염색공장이 있었는데 그 옆에 있는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여러 명이 살고 있었다. 형님은 내가 교동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날 찾으러 교동에 가셨다고 했다.

나는 다시 형님을 만나러 교동으로 갔다. 길이 엇갈려 형님은 나를 찾지 못하고 인천으로 가셨단다. 그곳에서 인천행 배가 있을 때까지 약 15일간을 머물렀는데 그곳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내가 다녔던 연백국민학교와 그 뒤쪽으로 우리 집 지붕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15일간을 매일 산에 올라가 우리 집 지붕을 쳐다보며 수도 없이 울었다. 보름 후 다시 인천으로 와 헤어진 지 5개월여 만에 드디어 형님을 만났다. 나는 형님과 의논하여 밥벌이를 위해 동인천역 앞 축현여관 입구에서 다시 담배장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돈을 받고 작은 배로 비밀리에 북한을 오가며 북쪽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데려오는 연락자가 있었다. 1951년 연말에 형님과 사촌형님이 합자하여 배를 하나 사서 형수와 어린 조카와 사촌 형님네 식구들을 데려왔다. 그런데 어머니와 동생 두 명은 황해도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에 있는 외가에 가 있었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그곳까지 갈 수가 없어 함께 오지 못했다. 그것으로 나는 어머니와 영영 이별을 한 것이다. 어머니가 오지 못한 것을 알고 너무 눈물이 났다. 그 당시는 오랜만에 만난 형수님이 반갑지도 않고 섭섭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천천히 생각해 보니 ‘이게 우리 형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형수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이거는 역사가 이렇게 만든 거지. 누구 죄도 아니지 않냐. 이걸 내가 원망을 하면서 다른 행동을 해? 그러면 내가 사람이 안 되지. 이제부터 어머니, 동생 둘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아야겠다.’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때부터 형님과 형수님 어린 조카와 나 네 식구는 신흥동에 방을 한 칸 얻어 생활하게 되었다. 1952년 신학기가 시작되어 형님은 주안초등학교, 형수님은 평택에 있는 중앙국민학교로 복직 되었는데 나는 3살짜리 조카를 봐 주어야 하므로 형수를 따라 평택에 따라가서 1년을 지낸 뒤 형수님이 인천 문학국민학교로 전근되는 바람에 다시 네 식구가 모여 살게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자유공원에 있는 성공회 건물에서 개교한 피난민학교인 황해중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서류 없이도 피난 온 학생들의 말만 듣고 학력을 인정하고 입학시켜 주었다. 그 뿐 아니라, 그 학교는 교복은 물론이고 학용품이나 교과서도 변변히 준비할 수 없이 가난했던 피난민 학생들이 거의 무료로 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후 나는 황해 중학교, 가마니가 깔린 교실 반 칸 크기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40여명의 학생들과, 식당에서 쓰는 긴 의자를 책상으로 삼아 무릎을 꿇고 앉아 수업을 받았다. 물자와 돈이 귀하던 그 시절 검정색으로 염색한 광목으로 형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교복을 입고 노트는 누런 마분지를 묶어 쓰며 학교에 다녔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어머니가 어떻고 동생이 어떻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가만히 있다가 “됐다. 그 얘기 그만하자. 그래 너 어머니 모시고 있어서 좋겠다.” 부러운 마음에 그냥 면박을 주곤 했다. 어느 해인가, 우리 애들이 티비를 켜놨는데. 어버이날 프로가 나왔다. 어떤 갈치 장사하는 아주머니가 아들하고 피난 나온 이야기를 하는데 그냥 눈물이 확 났다. 밥술 넣는데 목이 메었다. 그래서 일어나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삼키고 있는데 아내가 “왜 밥 먹다 말고 그러냐. 반찬이 없어서 그러냐. 그러면 반찬이 부족하다 얘기를 하지 왜 밥을 안 먹고 그러냐?”하며 골을 내는데 얼마나 야속한지, 내가 반찬 때문에 그런 게 아닌데….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학교에 갔다. 나는 대학교를 마치고 제일고에서만 12년을 근무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저녁때 동료 선생님하고 대화를 했다. 내가 집사람을 만나 어떻게 해야 되나 이야기를 나눈 뒤 퇴근하여 아내와 대화를 했다. “내가 반찬 타령을 했냐. 내가 생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냐. 나 어머니 때문에 그랬다.” 그제서야 아내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훔쳤다. 지금 내 나이 팔십이 넘었지만 어머니 생각, 동생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많이 난다. 어머니는 중간에 돌아가셨던 걸 확인하였다. 언젠가 날짜는 모르지만….

 

황해도 연백군중앙군민회가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북녘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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