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균형과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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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균형과 균열
  • 김선
  • 승인 2020.06.23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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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과 고전읽기 도전하기]
(2)이방인-⑲빛의 칼날과 총소리

인천in이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서유당과 함께 어렵게만 느껴지던 동·서양의 고전 읽기에 도전합니다. ‘서유당의 고전읽기모임인 하이델베르크모임Jacob 김선(춤추는 철학자), 김현(사회복지사), 최윤지(도서편집자), 서정혜(의류디자이너), 소순길(목사), 이광남(칼럼니스트)’ 등이 원서와 함께 번역본을 읽어 내려가며 삶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고전읽기- 알베르 카뮈(김화영 역), 이방인 L’Etranger, 민음사.

: Jacob 김 선

 

C’est alors que tout a vacillé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레몽이 권총을 뫼르소에게 주었을 때 그 위로 햇빛이 번쩍 반사되며 미끄러진다. 모든 것이 그들을 둘러막아 가두고 있듯이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눈길을 내리뜨지도 않고 서로 마주 노려보고 있으며 이곳은 모든 것이 바다와 모래와 태양, 그리고 피리 소리와 물소리가 자아내는 이중의 침묵 가운데 정지해 있다. 긴장감이 최고조다. 그 순간 뫼르소는 권총을 쏠 수도 있고 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기 아랍인들이 뒷걸음질을 하며 바위 뒤로 스며들 듯이 달아나 버린다. 절정이 싱겁게 지나간다. 그래서 레몽과 뫼르소는 갔던 길을 되돌아온다. 레몽은 기분이 좀 풀린 듯 집으로 돌아갈 버스 이야기를 한다. 다행이다.

  뫼르소는 그와 오두막까지 함께 갔고 레몽이 나무 층계를 올라가는 동안 첫 계단 앞에 서 있다. 햇볕 탓에 머릿속이 울린 데다가 또다시 오두막집 여자들을 상대할 것을 생각하니 맥이 풀린 것이다. 햇볕만큼 여자를 상대하는 것이 뫼르소에게는 버거운 일인가 보다. 그러나 강렬한 햇빛 속에 서 있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대로도 위로도 가지 못하니 내려가는 것이 답이리라. 첫 계단이라 결정이 빠른 것이다. 잠시 후에 뫼르소는 다시 바닷가 쪽으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한다.

  모래 위에서 바다는 잔물결들의 가쁜 숨결을 다하여 헐떡거리고 있다. 보는 마음이 그런 것인지 뫼르소는 천천히 바위께로 걸어가고 있는데 햇볕에 쬐어 이마가 부풀어 오른 것을 느낀다. 더위 전체가 뫼르소 위로 내리눌러 그의 걸음을 막는다. 얼굴 위로 무더운 바람이 와 닿을 때마다 뫼르소는 이를 악물고 바지 호주머니 속에서 두 주먹을 부르쥐며 태양이 주는 영문 모를 취기를 견뎌 이기려고 태양에 맞서는 이카루스처럼 전력을 다해 몸을 버티고 있다.

이카루스의 날개
이카루스의 날개

그 결말을 알기에 뫼르소를 조심히 지켜보게 된다. 뫼르소는 오랫동안 걷는다. 보는 시선도 무심히 따라간다.

  햇빛과 바다 수증기로 눈부신 후광에 둘러싸인 거무수름한 바위 덩어리가 멀리 조그맣게 바라다 보인다. 그곳에 늘 있었던 바위의 침묵하고 있는 모습이 거무스름하다. 뫼르소는 바위 뒤 서늘한 샘을 생각한다. 햇볕을 피하고픈 마음이 샘을 이룬 것인가? 뫼르소는 졸졸 흐르는 샘물의 속삭임을 되찾아가고 싶었다. 태양과 힘겨운 노력과 여자의 울음소리를 피하고 싶었으며 마침내 그늘과 그늘 밑 휴식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간절함은 절절함으로 변한다. 바위로 가까이 갔을 때 레몽과 상대한 녀석이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아랍인은 혼자였다. 뫼르소도 혼자다. 드러누워 있는데 두 손을 목 밑에 괴고 이마만 바위 그늘 속에 넣고 온몸에 햇볕을 받고 있었다. 햇볕을 피하려는 뫼르소 자신과는 반대다. 푸른 작업복이 더위 속에서 김을 내고 있다. 뫼르소는 좀 의외였다. 자신만의 의외는 아무도 의외로 보지 않는다. 뫼르소에게 있어 그 사건은 이미 끝난 것이어서 뫼르소는 그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리로 간 것이다. 아랍인은 뫼르소를 보자마자 조금 몸을 쳐들어 올리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만약을 대비하는 자세다. 물론 뫼르소도 웃옷 속에 들어 있는 레몽의 권총을 그러쥔다. 유리해 보인다. 그 유리함이 불리함이 되질 않길 바랄 뿐이다.

  아랍인은 다시금 몸을 젖혀 누워 버렸으나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는 않는다. 뫼르소는 그로부터 십여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절반쯤 감은 아랍인의 눈꺼풀 사이로 그의 시선이 새어 나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기를 가르는 전파처럼 말이다. 아랍인의 모습은 타는 듯한 대기 속에서 뫼르소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나른하고 가라앉아 있다.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배경이다. 벌써 두 시간째 낮은 걸음을 멈추고 있다. 긴장이 너무 길다. 수평선 위로 증기선이 무심히 지나간다. 뫼르소는 한쪽 눈 가장자리에서 검은 얼룩같이 보이는 증기선을 분간할 수 있었다.

  뫼르소는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일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햇볕에 진동하는 해변 전체가 뫼르소 뒤에서 그를 죄어들고 있었다. 멈춘 걸음도 더 이상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뫼르소는 샘으로 몇 걸음 나선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얼굴 위에 드리운 그늘 탓인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뫼르소는 기다린다. 뜨거운 햇볕에 빰이 타는 듯하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프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지끈거렸다. 지독한 햇볕의 인상은 뫼르소를 늘 따라다니나 보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뫼르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뫼르소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뫼르소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 태양빛에 비추며 뫼르소에게 겨눈다. 이제는 물러날 수 없는 거리 안으로 서로 들어선 것이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뫼르소의 이마를 쑤신다. 아랍인은 뫼르소의 약점을 아는 사람같다.

  눈썹에 맺힌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는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 뫼르소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뻗어 나오는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대 전환이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온다. 뫼르소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쥔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진다.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된다.

궁정동 총소리
정병진, 2014, 궁정동 총소리

10·26도 밀폐된 공간만 다를 뿐 그렇게 시작된 것은 아닐까? 의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뫼르소는 한낮의 균형과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쏜다. 깨닫고 한 행동이라 더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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